▲ 이종석 NSC 사무차장. 노 대통령의 외교·안보·대북 정책이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 숨은 실세로 통한다. | ||
“궁금해서 집에 그냥 못 앉아있겠어요”라는 게 노 대통령의 말이었다.
노 대통령이 자리에 앉자 NSC 이종석 사무차장이 최영진 차관에게 보고를 넌지시 요구했다.
“차관님, 아까 그것, 알 자지라 TV에 나온 것 있잖습니까.”(이 차장)
“예,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최 차관)
최 차관이 이 같은 보고를 할 때쯤인 밤 10시20분, 김선일씨는 바그다드 인근 고속도로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됐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로 돌아온 뒤 불과 1시간여 만에 이 차장으로부터 “김씨 시신이 발견됐다”는 통한의 비보를 보고 받았다.
이상이 22일밤 외교부가 노 대통령에게 ‘희망이 보인다’는 엉터리 보고를 한 경위다. 정부의 무능이 극적으로 드러난 한 편의 웃지 못할 소극(笑劇)이었다.
이 같은 최악의 상황 오판의 책임은 물론 외교부에 있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심야에 예정에도 없이 외교부 상황실을 방문하게 된 데에는, 그리고 ‘희망이 보인다’는 보고를 한 데에는 NSC 이 차장의 책임이 컸다는 게 외교부 안팎의 관측이다. 이 차장이 희망적인 보고를 하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노 대통령이 흥분을 참지 못해 밤중에 외교부로 쫓아갔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노 대통령이 이 차장을 질책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은 과연 이 차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선일씨 사건을 기화로 한나라당은 물론 그동안 숨죽여왔던 여권 내부의 ‘이종석 비토 세력’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외교안보 라인 전면 교체를 주장하고 있다. 겉으로는 고영구 국정원장과 반기문 외교장관 경질을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의 칼끝은 정확히 이 차장을 겨누고 있다는 분석이다.
여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그동안 이 차장이 노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힘을 행사한 것 아니냐”면서 “그런데 자주 논란만 일으키고, 결국에는 이번 김씨 사건으로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외교부 내에서도 “이번 사건에서 NSC가 한 일이 도대체 뭐가 있느냐”면서 외교부만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분위기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 사이였던 외교부와 NSC가 또다시 한판 붙게 됐다.
이 차장의 낙마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차장이 대북전문가이지 결코 외교전문가는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도 펴고 있다. 이 차장은 49년 이후 발간된 북한 노동신문을 모두 분석할 정도의 대북 전문가로 햇볕정책의 이론을 제공한 진보적인 학자였다. 노 대통령과는 지난 87년 이후 인연을 맺어왔고, 2002년 대선때는 외교안보 공약의 기초를 다듬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 NSC의 권한과 기능을 대폭 강화, 당시 만 45세에 불과했던 이 차장에 국가 외교안보 정책의 총지휘권을 맡겼다. NSC는 국가정보원 외교부 국방부 통일부에 흩어져 있던 외교·안보·국방·대북 정보를 종합하고 업무를 총괄조정하는 기구가 됐다. 대테러 및 국가위기관리 기능도 NSC가 떠맡았다. DJ정부에 비해 인원이 무려 7배나 늘어났다. 대북 평화번영정책, 대미 실용외교, 협력적 자주국방 등 노 대통령의 외교·안보·대북 정책이 모두 이 차장의 머리에서 나왔다. 지난해 이라크 추가 파병 규모를 놓고 외교부와 NSC가 힘겨루기를 벌였을 때, “3천 명이면 된다”는 이 차장의 말 한마디에 최소 5천 명 이상을 주장하던 국방부와 외교부가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있었던 북핵 3자회담 확대를 둘러싼 NSC와 외교부의 이견, 이라크 추가파병을 둘러싼 국방부·외교부와 NSC의 대립으로 외교안보 라인은 대미 자주파와 동맹파로 나뉘어 심한 내홍을 겪었다. 올 1월에는 외교부 직원들의 대통령 폄하발언 사태가 터졌다. 이 같은 갈등의 핵심에는 이 차장이 있었다. 보수적인 국정원, 국방부, 외교부 내부에서는 ‘경험이 적고, 북한에 편향된, 아마추어 외교’라는 말로 이 차장을 비판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지난 5월 탄핵기각으로 직무에 복귀하자마자 이 차장을 수석·보좌관회의 배석자에서 정식 참석자로 승격시켰다. 6월초에는 사무차장을 사무처장으로 승진시키는 NSC법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종석 개인을 위한 법 개정이라는 뒷말이 나왔으나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이제 김선일씨 사건으로 사정은 달라졌다. 여당은 물론 외교부 국방부 국정원 등에서 터져나오는 이 차장 책임론이 점점 세를 얻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차장이 지난 19일 장성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북한에 적개심을 갖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가 일부 장성들로부터 항의성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29일 뒤늦게 언론에 보도됐다.
국방부가 보도자료를 내 사실을 부인했지만, 이 차장 낙마를 노린 군 일각의 조직적인 물밑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외교안보 라인 교체를 일단 감사원의 김선일씨 사건 특감 이후로 미뤘다. 시간을 벌자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청와대는 ‘이종석 없는 노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은 상상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이 차장을 무조건 보호만 할 수는 없는 분위기다. 노 대통령의 선택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