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근 부영 회장 | ||
당사자들의 은밀한 거래로 영원히 비밀일 것 같던 정경유착도 기업인의 배신(?)으로 종종 깨지기 마련이다. 검찰 수사 초기 기업인들은 뇌물이나 불법 정치자금 제공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다가도 결국에는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특히 검찰 수사가 뇌물이나 불법 정치자금 수사로 그치지 않고 분식회계나 탈세, 기업인의 개인비리 등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면 기업인은 여지없이 백기를 들고 만다.
그러나 이 같은 공식으로는 중견 건설업체 ㈜부영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사건을 풀 수 없다. 회사가 자칫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부영의 이중근 회장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근 회장은 정말 정치인에게 불법자금을 준 사실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회사가 쓰러지더라도 끝까지 함구해야할 속사정이 있는 것일까.
이중근 회장은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한창 피치를 올리던 지난 2월19일 처음으로 검찰에 소환됐다. 그때만 해도 검찰 주변에서는 ㈜부영이라는 회사의 규모를 감안, 이중근 회장이 정치권에 기껏해야 수억원 정도의 불법자금을 줬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만 해도 삼성·현대차·롯데·한진·금호 등 대기업의 불법자금 규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부영의 비리는 곁가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4월 초 검찰 고위관계자가 “㈜부영은 게이트 수준이다. 생각보다 많은 게 나올 것이다”고 언급하면서 상황은 백팔십도로 반전됐다. 총선을 불과 며칠 앞둔 상황에서 검찰의 이 같은 언급이 전해지자 호남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은 “㈜부영에 대한 수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 주변과 민주당을 겨냥한 총선용 수사”라면서 강력 반발했다.
이처럼 ㈜부영이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왔던 것은 ㈜부영이 조성한 비자금 규모와 회사의 성장 배경때문이다.
수사팀은 지난 1996년부터 2001년 사이 협력업체에 지급할 공사대금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2백70억원 상당의 회사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으로 지난 4월8일 이중근 회장을 구속수감했다. 당시 검찰이 파악한 ㈜부영의 비자금 규모는 1천2백억원대에 달했다.
㈜부영은 지난 90년대 중반까지 도급 순위가 70∼80위권에 머물렀으나 지난해에는 18위로 급상승하면서 그 배경에 대한 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YS정부 때 자리를 잡은 ㈜부영은 DJ정부 때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1천2백억원의 비자금 규모가 드러나면서 자연스럽게 의혹의 시선은 이 비자금과 ㈜부영의 급성장 배경과의 상관관계에 쏠렸던 것이다.
검찰은 자금 추적 끝에 1천2백억원의 비자금 중 6백50억원은 제3자의 명의를 빌려 회사에 유상증자 대금을 납입한 것으로 확인했다. 또 이중근 회장이 은밀하게 보관해왔던 5백80억원대의 채권을 찾아내 압수했다.
그러나 여전히 1백억원대의 자금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자금은 대부분 채권이기 때문에 이 자금을 받은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채권을 현금화하지 않으면 확인할 방법도 없는 상태다.
▲ 지난 2월부터 정가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주)부영 현판. | ||
검찰은 채권추적을 통해 봉태열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2001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이중근 회장에게서 2002년 7월로 예정된 회사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에서 잘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국민주택채권 형태로 1억3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확인하고 지난 5월9일 봉 전 청장을 구속수감했다. 당시 봉 전 청장은 1억3천만원을 이중근 회장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검찰은 또 김영희 전 남양주시장이 2002년 5월 부영에서 아파트 건설과 관련한 인허가 편의 제공 등 청탁을 받고 채권으로 수억원을 받은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정작 이중근 회장은 봉 전 청장에게 돈을 건넨 사실에 대해 “나는 모르른 일이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 전 시장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때부터 검찰 주변에서는 ㈜부영이 망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검찰에 밉보인 결과 수사팀이 이중근 회장에게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구형해 결과적으로 회사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확인한 이중근 회장의 혐의는 조세포탈 액수는 1백48억원이다. 현행법은 조세포탈 세액이 5억원을 넘으면 포탈세액의 2∼5배까지의 벌금을 병과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이중근 회장의 포탈세액을 감안한다면 최고 7백40억원의 벌금도 부과될 수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내실있는 회사라 하더라도 7백40억원의 벌금을 받게되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이를 의식한 변호인단은 이중근 회장에게 “검찰을 자극했다가는 엄청난 액수의 벌금으로 회사가 쓰러질 수 있으니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정치인을 털어놔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변호인단은 이어 “우선 회사를 살려놓아야 나중에라도 그 정치인을 어떤식으로든 도움을 줄 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러나 이중근 회장 쪽에서는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은밀히 이뤄진 일을 어떻게 진술할 수 있느냐”면서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변호인단의 설득에도 이중근 회장은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검찰은 용처가 확인되지 않은 1백억원대의 채권도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다만 이중근 회장의 입을 열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검찰 일각에서는 ㈜부영 사건을 실패한 수사로 보고 있다.
항간에는 이중근 회장이 DJ정부 실세들에게 전방위 로비를 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를 특정해서 진술할 수 없었던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너무도 엄청난 거물급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에 회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도저히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는 분석마저 제기되고 있다.
물론 진실은 이중근 회장만이 알고 있다. 이중근 회장이 진술하지 않는 한 진실은 당분간 묻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재용씨 비자금 사건에서 보듯 20년 가까이 지난 채권도 결국에는 꼬리를 잡혔다.
이중근 회장은 그동안 전국 70개 학교에 기숙사나 강당, 도서관을 기증하는 등 자선사업을 활발히 해왔다. 그러면서도 이중근 회장은 서영훈 전 민주당 대표에게 불법정치자금으로 6억원을 건네기도 하고, 세무조사 무마청탁과 함께 봉태열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에게 1억3천만원의 뇌물을 건네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중근 회장이 정말로 교육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기업인인지, 아니면 겉으로는 자선사업가로 잘 포장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업인인지에 대한 평가는 아직은 이른 것 같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