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조원대 달하는 기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일부 공무원과 업체 관계자 사이에 금품이 오간 단순한 뇌물사건인가 아니면 정치권 핵심 실세들이 연루된 ‘게이트’ 수준의 조직적 비리인가.
정촉기금 수사에 대해 업계가 비상한 관심을 갖는 것은 검찰이 2년여 전에 일단락했던 사건을 다시 재개했기 때문이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검찰이 수사를 재개한 것은 감사원이 정촉기금과 관련한 감사를 마친 뒤 관련 비리를 검찰에 고발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검찰은 감사원 고발 전부터 관련 비리에 대한 수사를 이미 재개한 상태다. 이를 놓고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정촉기금에 대해 뭔가 다른 단서를 파악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검찰이 2년이 넘은 사건 파일을 다시 꺼내 수사를 재개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검찰이 정촉기금 비리에 대해 처음 칼날을 들이댄 것은 지난 2002년 4월이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벤처지원자금을 받게 해달라는 청탁 등과 함께 벤처기업으로부터 4천만원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로 정통부 산하 정보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손아무개씨를 구속했다. 또 검찰은 손씨에게 뇌물을 건넨 벤처기업 U사 대표 장아무개씨를 뇌물공여 혐의로 함께 구속했다.
손씨는 정통부 정보통신정책국장으로 재직하던 2001년 8∼9월 정통부에서 조성한 정촉기금을 받게 해주고 회사에서 개발한 주전산기를 정통부나 행정자치부 등 관공서에 납품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장씨로부터 4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당시 수사를 통해 정통부 정보통신정책국 기술정책과장 임아무개씨가 99년 10월 장씨에게 회사 주식 5천 주(2억5천만원 상당)를 10분의 1 수준인 2천5백만원만 받고 제3자에게 넘겨주도록 부탁한 혐의를 포착했었다. 또 장씨가 정통부 산하 연구기관 직원 4명에게도 1억6천만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한 사실을 밝혀내는 등 정촉기금 지원과정에서 금품수수 비리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손씨 등을 구속한 며칠 뒤 최규선 게이트에 착수하는 바람에 모든 수사인력을 최규선 게이트에 투입, 정촉기금 비리 수사는 뒷전으로 밀렸던 것이다.
당시에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검찰 주변에서는 벤처기업 U사의 비리에 전·현직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연루됐고, 이들이 U사를 키워 정치자금을 받는 창구로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게다가 U사 비리에 연루된 정·관계 인사들이 검찰 수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U사 관련 비리의 중심에는 대표 장씨가 있다. 장씨의 입을 통해서 누구에게 로비를 했고,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정치자금이나 뇌물을 제공했는지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
장씨는 그러나 지난 2002년 8월 손씨에게 4천만원을 제공한 뇌물공여 혐의가 확정되자 곧바로 미국으로 출국한 뒤 아직까지도 귀국을 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U사에 정통부 최고위층인 K씨는 물론, 특정지역의 특정모임 멤버이며 정·관계 실세인 K·H씨 등 수명이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U사에는 정치권에 있던 현 정부 최고위 인사의 보좌관 출신 2명이 비등기이사로 등재했었던 사실이 드러나 이 같은 의혹을 더하고 있다.
이들 보좌관들은 U사의 비상임이사로 있으면서 U사 주식을 각각 2만여 주 가량 받았다. 물론 이들 보좌관들이 비상임이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주식을 받은 것 자체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U사가 정통부 등에 한창 로비를 할 당시인 2000년을 전후해 이들 보좌관들이 비상임이사로 등재해 있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U사 대표 장씨가 정촉기금을 받기 위해 전방위로 로비를 할 때 이들 비상임이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돈다.
이 사건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정촉기금 수사와 관련, “1999∼2000년 정부 부처 전직 최고위 관료와 고위 정치인 등 특정지역 인사들이 정촉기금을 활용, 특정회사를 키우고 이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는 설이 끊이지 않았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번 정촉기금건은 개별적 비리를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벤처 붐을 업고 특정 업체를 도운 ‘비리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촉기금 비리 관련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일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검찰은 지난 2002년 4월 정통부 국장 손씨를 구속할 때 정보통신정책국 기술정책과장이었던 임씨의 비리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임씨에 대한 수사는 신병확보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수사가 중단됐다. 임씨는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중국 주재관으로 파견돼 2년여 동안 근무하다 2월에야 귀국했던 것이다. 검찰은 그동안 임씨를 조사하지 못하다가 수사를 재개한 뒤 지난 11일에서야 임씨를 특가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지난달 29일 수십억대 연구비가 지원되는 정보통신부 연구용역을 수주토록 도와주고 U사 대표 장씨로부터 1억6천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전 부장 윤아무개씨 등 4명을 구속했다. 검찰은 이 같은 진술도 이미 지난 2002년 4월 장씨로부터 확보해놓은 상태였다. 2년여 만에 이 같은 단서와 진술을 토대로 임씨와 ETRI 관계자들을 구속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검찰이 지난해 12월쯤 U사 대표 장씨를 수배조치를 취했다는 점이다. 이는 검찰이 장씨 주변에 대한 조사를 통해 다른 혐의를 파악하고 수사를 사실상 재개한 것으로 받아들여 진다. 물론 검찰이 어떤 단서를 포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감사원은 올 초 정통부와 산하 정보통신연구진흥원, 한국전산원을 대상으로 정촉기금 운용실태에 대한 특별감사에 착수했고, 검찰도 지난달 말부터 ETRI 관계자를 긴급체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재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장씨가 귀국해야 전·현직 핵심 관계자들의 연루 여부 등 U사와 관련된 비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장씨는 자신의 혐의가 확정되는 순간 미국으로 출국해 현재까지도 귀국을 미루고 있다. 출국 이후 단 한 차례도 귀국한 바 없는 장씨가 정촉기금 비리가 다시 불거진 이 시점에서 귀국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태다. 검찰은 장씨가 출국한 배경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검찰 수사의 확대 가능성에 대비한 도피성 출국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검찰은 장씨의 귀국 여부와 관계없이도 수사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면서 관련 계좌추적을 진행하고 있다.
업계는 검찰이 2년여 만에 수사를 재개한 이유가 단순히 중단됐던 사건에 대한 마무리 차원인지 아니면 뭔가 확실한 물증을 갖고 이를 확인하는 차원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것이 향후 몰아칠 후폭풍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