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86년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으로 검거돼 압송중인 김태촌씨. 그는 최근 법정에서 그 사건이 한 검사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 ||
주먹세계의 거물급 보스 가운데 유일하게 수감중인 김씨는 10월3일로 징역형이 만기가 되는 데다가, 그동안 그의 발목을 잡아왔던 7년의 보호감호 역시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최근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보호감호를 규정한 사회보호법의 폐지를 당론으로 결정하고 폐지안을 곧 상정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출소하면 다시 주먹세계가 술렁거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경찰 주변을 뒤덮고 있다.
이런 가운데 김씨가 지난 14일 법정에서 뜻밖의 ‘폭탄발언’을 터트려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1986년 7월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황아무개씨 피습 사건’을 사주한 이가 당시 서울고검의 박아무개 검사였다고 주장한 것. 김씨가 주범으로 붙잡혔던 이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도 한참 지난 상태. 그가 난데없이 18년 전의 일을 법정에서 다시 끄집어낸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지난 1986년 여름은 ‘납량특집’이 따로 필요없었다. 7월과 8월에 잇따라 벌어진 뉴송도호텔 사장 황씨 피습 사건과 서진룸살롱 살인 사건은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김씨에 의해 재론되고 있는 뉴송도호텔 사건의 당시 취재 파일을 다시 들춰보자.
7월26일 새벽 4시40분께. 뉴송도호텔 객실 201호에 복면을 하고 낫과 곡괭이를 든 세 명의 괴한이 들이닥쳤다. 혼자 잠자고 있던 사장 황씨는 이들에게 양쪽 다리 등에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당시 이들은 황씨에게 “진정서 좋아하네”, “또 진정해 보라”라며 폭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괴한들이 말하는 진정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당시 경찰 수사 자료를 보면 뉴송도호텔의 사장 황씨는 서울고검의 박아무개 검사와 동업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호텔이 경영난에 빠지자 박 검사가 황씨에게 자신의 투자분인 5천만원의 반환을 요구했다는 것. 이 과정에서 박 검사는 평소 친분이 있는 김씨에게 ‘환수’를 부탁했고, 김씨는 부하들을 시켜 황씨를 협박한 끝에 1억5천만원의 어음을 받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돈을 빨리 갚으라는 협박이 계속 이어지자 황씨가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등에게 박 검사에 대한 진정서를 냈다는 것. 그런 뒤에 김씨 부하들의 기습 폭행이 이어졌고, 황씨는 김씨의 보복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병원을 옮겨다녀야 했다. 이 사건은 ‘미명의 습격’이 벌어진 지 한 달 만인 8월23일에야 언론에 보도됐다.
경찰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면서 진정 대상자였던 박 검사는 검사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사표가 수리됐다. 김씨는 피신한 지 15일 만인 9월7일 검거됐다. 당시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호텔 나이트클럽 지분 40%를 가진 나를 황씨가 계속 무시하고 쫓아내려 해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박 검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인천지검에서도 “박 검사 스스로도 이번 사건을 자신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고, 주범인 김씨도 박 검사는 이 사건과 아무 연관성이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황씨 역시 박 검사의 연관성을 의심만 할 뿐이어서 박 검사가 이 사건을 지시했거나 또는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수사를 종결했다.
그렇다면 과연 김씨와 당시의 박 검사(현재는 변호사)는 무슨 관계일까. 전남 광주 출신으로 S대를 졸업하고 60년대 초 법조계에 입문한 박 전 검사는 검찰 생활 23년 가운데 3분의 1 이상을 광주에서 보냈다. 그가 김씨와 첫 인연을 맺은 곳도 바로 광주였다.
86년 검거될 당시 김씨는 “박 검사님은 13년 전 광주에서 처음 만난 이후 지금껏 계속 존경해온 분이며, 이번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나 때문에 큰 피해를 입어 죄송할 따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 두 사람의 관계는 호형호제할 정도로 상당히 끈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86년 6월18일 김씨가 서울 한양대 앞 둔치에서 전국의 주먹들을 소집해서 가진 ‘새마을 축구대회’ 행사였다. 박 검사는 현직 검찰 간부임에도 이 행사에 참석해서 직접 시상식을 하기도 했다. 86년 1월에 김씨가 출소한 직후에는 한 조경회사의 부사장 자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두 사람이 사석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도 여러 차례 눈에 띄었다. 하지만 ‘물과 불’ 같은 검사와 건달의 ‘우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뉴송도호텔 사장 황씨 피습사건은 결국 그 분수령이 됐다. 김씨는 당시 이 사건의 주범으로 징역 5년,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18년 만인 지난 9월14일 인천지법에서 열린 보호감호 재심 청구재판에서 김씨는 “황씨 습격 사건은 박 검사의 사주를 받고 한 것”이라며 “박 검사는 당시 황씨가 상급 기관에 자신에 대한 진정서를 내자 앙심을 품고 내게 살해 지시를 내렸다”고 폭로했다.
처음 구속될 당시 박 전 검사를 철저하게 보호하고자 했던 김씨가 막상 형량을 모두 소화해낸 지금에 와서 새삼 과거의 일을 다시 폭로하고 나선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현재로선 가장 그럴듯하게 제기되는 것이 김씨가 강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평소 ‘친형님’처럼 모셔온 박 전 검사가 막상 수감된 이후부터는 자신을 남처럼 대했던 데 대한 섭섭함이 컸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분석이 그것.
이에 대해 김씨의 부인 이영숙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박 전 검사에게 변론을 실제 부탁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설사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한 형제처럼 지냈는데 들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박 전 검사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씨는 “박 전 검사가 자신이 변론을 거절하자 김씨측에서 나중에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며 수억원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증거를 내놔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전 검사에 대한 김씨의 심경 변화는 이미 과거에도 몇 차례 감지된 바 있다. 뉴송도호텔 사건으로 수감중이던 김씨는 89년 폐암 진단을 받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김씨의 한 측근은 “당시 김씨가 화를 삭이며 박 전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면서 “박 전 검사가 용서를 빌었지만 김씨의 반응이 냉랭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당시 김씨의 운전기사 역할을 했던 구상열 목사의 ‘비망록’에도 두 사람의 달라진 관계가 언급돼 있다.
2001년 초에는 김씨가 한 측근과 가진 옥중 면담 기록이 <신동아>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여기서 김씨는 “인천 뉴송도호텔 사건으로 내가 구속됐잖아. 그때 사실은 어느 부장검사가 연루됐지. 그 사람이 부탁한 일을 해결하려다 황○○ 사장을 찔렀어”라며 박 전 검사의 사주설을 언뜻 내비쳤다.
다른 해석들도 나온다. 조폭 수사를 오랜동안 담당해온 경찰의 한 관계자는 “무엇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조폭 세계의 생리상 배후를 폭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같은 내용을 밝히는 것은 ‘이제 더이상 조폭 세계에 대한 미련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서울경찰청의 한 조폭 담당 수사관은 “김씨가 보호감호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적 차원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는 “김씨는 징역이야 어쩔 수 없이 살았지만, 앞으로 보호감호까지 사는 것은 정말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며 “어떻게 하든 보호감호 만큼은 피해보려는 의지가 대단한 것 같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현재 열린우리당과 법무부가 당정협의를 통해 사회보호법 폐지안에 사실상 합의를 한 만큼, 굳이 이같은 폭로전이 없더라도 김씨가 10월경에 출감하게 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우세하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사회보호법 폐지안은 인권 보호 차원에서 여야 합의로 이미 법안이 구성됐고, 이번 정기국회내에 통과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며 “법무부에서도 현재 청송감호소에 있는 약 2백여 명의 보호감호자를 법안 통과와 동시에 일괄적으로 출소시키는 데 합의가 된 상태”라고 밝혔다. 김씨도 정치권의 사회보호법 폐지안 움직임 등에 관해 상당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언론에서 “정부 여당이 조폭 두목의 석방을 앞당긴다”는 다소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는 것에 대처해 이번 폭로를 통해 자신이 당시 권력의 희생양이었다는 동정적 여론을 조성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기된다.
한편 이번 김씨의 폭로로 인해 18년 전 뉴송도호텔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것인지가 새로운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만약 김씨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지면 비록 옛날 일이긴 하지만 검찰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김씨의 법정 진술이 알려진 직후 박 전 검사는 “김씨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김씨가 작년 7월부터 그 동안의 재판기록과 함께 변호를 맡아달라고 요구해서 이를 거절했더니 나중에는 말도 안되는 주장과 함께 수억원을 요구해 왔다”고 반박한 바 있다.
이후 박 전 검사는 서울 서초동에 있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 계속 출근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무실 관계자는 “현재 변호사님이 맡은 사건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 출근할 계획이 없다”며 “기자들과 통화를 원치 않기 때문에 개인 연락처를 알려 줄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