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이 근무평정을 매겨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인사제도 개선안을 발표해 법조계가 술렁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0년 5월1일 있었던 신임법관 임관식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판사와 검사, 두 영역 종사자 모두 각자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러나 직장인으로서 ‘안정된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검사와 판사가 걷는 길은 크게 엇갈릴 수밖에 없다. 대체 왜 그럴까. 연수원 동기로 각각 검사와 판사를 선택한, 상징적인 두 인물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아보자.
연수원을 수료한 뒤 검사로 임관한 ‘김기소’씨. 우수한 사법시험 성적과 2년간의 연수원 성적을 토대로 동기들 중 선두권을 달리던 김씨는 첫 부임지로 서울중앙지검에 발령을 받았다. 같은 동기 검사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은 당연했고, 김씨는 내심 고속도로처럼 쭉 뻗은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2년 6개월간 서울중앙지검에서 안정된 검사생활을 한 김씨는 이후 광주지검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생활 연고도 전혀 없는 광주지만, ‘2년만 근무하면 다시 서울로 올라가겠지’ 하며 자위한다.
그러나 다음 발령지는 예상했던 서울중앙지검도, 법무부도 아닌 부산지검. 지난 5년간 부진했던 수사 성과가 반영되고, 정권도 바뀌는 등 외부 변수 때문에 김씨는 동기 검사 중 선두그룹에서 멀어져버린 것이다. 그런 뒤에도 ‘만회’가 안된 김씨는 이제 전국 검찰청을 유람하고 다니는 ‘떠돌이 검사’ 신세다. 마땅히 고정된 정착지도 없어 어느 곳에서 변호사 개업을 해야 할지도 막막한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김기소씨와 마찬가지로 사법시험과 연수원 성적이 동기들 중 최상위권이었던 ‘이선고’씨. 이씨는 판사의 길을 걷기로 하고, 첫 부임지로 서울중앙지법에 입성했다.
사실 시험이야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지만 실무에 약했던 이씨. 하지만 판사로서 이씨의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서울중앙지법에서 2년간 근무한 뒤 이씨는 서울서부지법에서 2년 동안 일했다. 그 다음은 지방 ○○지법으로 발령이 났지만, 오히려 그는 사건이 적은 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라는 ‘배려’로 여겼다.
3년간의 지방생활 후 다음 부임지는 그의 예상대로 서울중앙지법. 이제부터는 수도권을 벗어날 일이 없다. 이씨의 그 다음 발령지는 서울남부지법(2년), 서울고등법원(2년), 대법원 재판연구관(2년) 등이다. 그런 뒤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해 역시 인천에서 근무한 이씨는 3년 뒤 다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로 발령받아 3년째 근무하고 있다.
판사 경력 20년 동안 이씨는 단 3년을 제외하곤 서울, 수도권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이유는 단 하나, ‘임관 성적’ 덕분. 사법시험과 연수원 성적이 판사에게는 향후 20년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판사 조직은 이처럼 변함이 없다. 어느 조직보다 안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동료들간에 경쟁도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연수원 수료할 때 ‘임관 성적’으로 만들어진 서열 그대로, 20년간 지속된다. 같은 동기 판사지만 하다못해 작은 문서에도 서열 순서대로 이름이 적힌다. 그러다보니 판사들에게는 누가 내 앞이고, 내 뒤인지는 의식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몸에 밸 수밖에 없다.
심지어 판사들 사이에서는 웃자고 하는 소리로, 식사를 할 때도 서열대로 숟가락을 먼저 들고, 식당 문을 나갈 때도 서열대로 줄을 서 나간다는 말도 있다. 한번 1등은 영원한 1등인 셈이다.
▲ 대법원 | ||
대법원이 정한 인사제도 개선안의 내용은 이렇다. 모든 판사는 해당 법원장으로부터 매년 한 번씩 근무평정을 받는다. 95년부터 비공식적으로 근무평정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껏 인사고과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근무평정 결과는 내년부터 10년차 판사의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연수원 24기 판사가 첫 적용대상이 된다.
판결 내용 자체는 평가대상에서 제외했지만, 판사들의 평가항목은 다양하다. 추상적으로는 판사로서의 자세, 성실성, 청렴성 등이 있고, 실무적으로는 사건을 처리하는 속도 등이 평가항목이다. 서울중앙지법처럼 판사들 수가 워낙 많은 법원의 법원장은 각 부의 부장판사에게 배석판사들에 대한 의견서를 받아 평가한다. 또 판사들은 자기소개서 같은 의견서를 법원장에 제출한다.
근무 평정에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했다. 판사들 중에 원하는 사람은 근무평정과 관련해 법원장 면담을 요구할 수 있고, 반대로 법원장이 필요한 경우엔 해당 판사를 부를 수도 있다. 또 한 판사에 대한 10년간의 근무평정에 유독 다른 의견을 낸 평가자의 근무평정은 무시하기로 했다.
이렇게 평가된 근무평정 점수는 법관 인사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이 근무평정 점수의 쓰임새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판사 경력 15년이 넘어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할 때다. 이럴 경우 연고지가 서울인 판사들은 수도권과 가까운 곳으로 발령 받기를 원한다. 대전지법이 그래서 선호도가 가장 높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어림없는 소리. 자신의 임관 성적이 상대적으로 낮으면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달라질 수 있다. 근무평정 점수에 따라 임관성적 즉 서열을 역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법관 사이에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근무평정 점수의 진짜 쓰임새는 따로 있다. 바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때다. 우선, 판사들에게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어떤 자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국 5개 고등법원(서울·대전·대구·부산·광주)을 비롯해 같은 레벨인 특허법원(대전)까지 모두 6개 법원의 각 부를 담당하는 부장판사가 여기에 해당된다. 행정부처로 따지면 차관급 대우를 받고, 운전기사가 딸린 관용차가 나온다.
판사 경력 21년째(임관 전에 군 복무자는 18년째)부터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대상이 된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보다 자릿수가 대폭 줄어들기 때문에 판사들로서는 동료들간 첫 경쟁무대인 셈이다. 이때 판사들 나이는 보통 40대 후반쯤 되니까 여기서 탈락하면, 적지 않은 나이에 ‘밀림’으로 불리는 변호사 업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승진 대상자 역시 ‘서열’대로 선택됐다. ‘임관 성적’이 이때도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때문에 젊은 판사들을 중심으로 이런 인사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다. 따라서 대법원의 이번 근무평정 제도는 이런 젊은 판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판사들이 근무평정 제도를 반기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평가가 얼마나 공정하게 이뤄지겠느냐 하는 의문과 궁극적으로 재판을 소신껏 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판사들에 대한 근무평정 제도는 대세일 수밖에 없다. 경쟁사회에서 판사들만 예외가 될 수 없는 법. 실제 내년부터 대상자가 되는 판사들은 벌써부터 삼삼오오 근무평정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다. 바야흐로 판사들도 경쟁시대에 접어든 셈이다.
이승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