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3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최병렬 김종필 조순형 대표가 탄핵정국에 대해 논의했다.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여권에서는 탄핵안 처리가 정치권 안팎에서 번지는 개헌론과 관련이 있다는 데에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탄핵안 가결에 따른 여론의 역풍이 가라앉고 나면 반드시 개헌을 무기로 들고 나와 국면을 전환시키려 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김근태 원내대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후 14일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가벼운 입놀림을 좋아하지 않는 김 대표다. 하지만 이날 김 대표가 밝힌 국민께 드리는 글의 상당 부분은 내각제 개헌 음모와 연결돼 있었다.
“한-민-자 야합의 개헌 음모를 분쇄하고 민주주의를 지킵시다. … 애초에 국정혼란을 이유로 탄핵에 반대하던 자민련이 가세하며 그들의 의도는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총선을 연기하고, 16대 국회에서 개헌을 통해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 탄핵은 총선 연기와 개헌을 통해 국민이 선출한 권력을 찬탈하려는 서막에 불과합니다.” 김 대표는 “3당은 차라리 합당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라고 질타했다.
비슷한 시각 정동영 의장은 “야 3당이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야합해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끌어내린 헌정 유린의 만행을 반드시 백지화시키고 그들의 무릎을 꿇릴 것”이라고 분을 토했다. 여권은 야 3당이 이미 내각제 등 분권형 개헌으로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왜일까.
문제는 김종필(JP) 자민련 명예총재다. JP를 보면 정국이 보인다. JP는 결코 ‘약속과 믿음’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난 1990년 ‘3당 합당’ 때도, 1997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의 대선후보 단일화를 이룰 때도, 온 나라를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엔 언제나 JP가 서 있었다. 그가 결정하는 쪽이 어제나 승리하는 쪽이었다. 이것은 그만의 동물적 정치감각과 생존력에 따른 것이다.
JP는 탄핵안 처리 하루 전만 해도 “무슨 탄핵이냐. 나라 걱정부터 해야지”라며 탄핵을 추진중인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하지만 하루 만에 그의 입장은 백팔십도로 뒤바뀌었다. 탄핵안 처리 직전인 12일 오전 JP는 “이미 활이 시위를 떠났다”면서 본회의 개의 직전 소속 의원들에게 “전원 찬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독려했다.
여기엔 당연히 이유가 있다. 당론을 여반장으로 뒤집게 한 반대급부가 주어졌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직후 자민련에선 당장 내각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김학원 원내총무는 탄핵안 가결 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면서 자진 퇴진을 촉구한 데 이어 “탄핵 정국을 노 대통령의 권한 정지로 마무리하지 말고 내각제나 분권형 통치제로의 개헌까지 이어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탄핵안 통과가 대통령의 누적된 실정에 대한 심판과 동시에 한국형 대통령제의 종언을 뜻하며, 따라서 차제에 내각제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겠다는 게 김 총무의 의지다. 즉, 자민련의 막판 급선회는 내각제에의 강한 유혹에 따른 것이 확실하다는 게 ‘JP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분석이다. 이는 단순한 추측을 넘어서 있다. JP의 정치행태와 스타일에서 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자민련 소속 충청권 출신의 한 의원은 “JP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와 분기때마다 끝까지 상황을 관찰한 다음 최종적으로 이기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결코 가볍게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런 JP가 탄핵안 의결 하루 전에 전격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바꿨다면, 이는 다른 야당들과의 사이에서 모종의 약속이 오간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탄핵에 반대하던 김종필 총재가 행정수도 이전과 폭설 피해로 예민해져 있는 충청 민심을 내버리고 찬성 쪽으로 급선회한 데는 내각제 유혹이 강하게 깔려 있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한 셈이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도 탄핵안 처리 직후 “(자민련과) 접촉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두 야당의 경우는 이미 공공연하게 ‘개헌공조’를 벌여왔다. 탄핵안 처리 다음날 한-민-자 3당 대표회담이 끝난 뒤 이승희 민주당 대변인은 “오늘 회담에서는 (개헌문제가) 논의되지 않았지만 다음 회담에서 논의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밝혔다. 곧바로 ‘실수’라고 말을 주워담았지만 정치권에서는 이를 단순 실수로 치부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다. 개헌론이 새삼스런 얘기가 아닐 뿐더러 무심코 민주당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강운태 민주당 사무총장은 “고건 대행체제가 국정을 끌어나가는 동안 (개헌론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이 당론”이라면서도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발생한 폐해를 지적할 필요성은 여전히 있다”고 강조했다. 강 총장은 더 나아가 “개헌은 노무현 대통령이 몇 차례 말한 바 있고, 후보 시절에 분권형 대통령제를 이미 언급했었다”고까지 했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도 지난 10일 기자회견에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이 나면 국민의 뜻을 모아 다음 대통령 선거를 할지, 개헌을 할지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결정날 것”이라고 개헌론을 언급했다. 지난 연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내각제나 이원집정제 등 분권형 개헌을 향한 양당의 접촉과 내통은 더욱 뚜렷해진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와 홍사덕 총무, 민주당의 조순형 대표와 유용태 원내대표는 모두 분권형 개헌론자들이며, 이들이 ‘탄핵안 4인방’이라는 점은 탄핵안 처리와 개헌과의 관련성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분석했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