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중인 김태촌씨는 얼마 전 징역형을 마치고 자신에게 내려진 보호감호 판결에 대한 재심재판을 받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는 얼마 전 징역형을 마치고 자신에게 내려진 보호감호(7년) 판결에 대한 재심 재판을 받고 있다. 현재 그는 신체감정을 위한 형집행정지 결정에 따라 병원에 누워 있다. 다시 7년의 세월을 더 창살 속에서 보내야 할지, 풀려나게 될지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 그에게 <일요신문>의 집요하고도 기습적인 인터뷰 공세는 일견 짜증스러움으로 다가올 만도 했을 터. 하지만 그는 몇 차례의 완곡한 거절 후에 이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언론을 피하고 싶지만, 지은 죄가 많다보니 이 또한 나의 책임인가 보다”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는 ‘화약고’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검찰과 경찰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고 있다. 인터뷰도 병실문을 열어놓은 채 진행해야 했고, 경찰은 김씨의 입끝과 기자의 손끝을 날카롭게 지켜봤다. 아직도 그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 상당하고, 그에 따른 파장이 또 작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한 톨의 찌꺼기 없이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김씨는 지난 8월부터 <시사저널>을 통해 자신이 옥중에서 써왔던 수기를 연재하며 숨겨진 과거사 가운데 일부를 서서히 토해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최근 미묘한 법정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86년 인천뉴송도호텔 사건과 77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사건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특히 당시 박정희 정권과의 결탁을 고백했던 신민당 사건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5~6공 정권과의 ‘권력 결탁설’이 이어질 듯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하자”며 일단 연재를 중지한 상태다.
김씨는 지난달 16일 법정에서 뉴송도호텔 사건과 관련해 “내게 살해를 사주한 박아무개 전 부장검사와 나눈 대화 녹취록과 혈서를 지금은 공개할 수 없다”며 한발 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다시 심경의 변화가 찾아온 것일까. 그의 고백을 통해 지난 권력과 주먹과의 어두운 결탁이 모두 세세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일요신문>이 굳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병실을 수차례 노크한 것도 이 부분에 대한 김씨의 입장을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김씨와의 인터뷰는 2일 저녁과 3일 낮 양일간에 걸쳐서 약 세시간 동안 이뤄졌다.
─뉴송도호텔 사건에 대한 진위 공방이 여전히 법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인 대화 녹취록과 혈서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씨는 지난 9월 <시사저널>에서 뉴송도호텔 사건에 대한 개요를 상세히 고백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초등학교 동창 사이이던 박 검사와 사업가 황씨가 호텔을 동업식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이권 다툼이 생겼다. 박 검사는 그 전부터 친분이 있던 내게 ‘황씨에게 돈을 받아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황씨는 위협을 느낀 모양이다. 황씨는 당시 청와대와 대검 등에 ‘박 부장검사가 깡패 조직을 동원해서 협박한다’는 투서를 넣었고, 감찰부 등에서 조사가 나오자 이에 박 검사가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박 검사는 ‘황씨를 없애야 겠다’고 내게 부탁했고, 나는 ‘살인은 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현직 검사가 당시 건달 두목의 약점을 빌미삼아 압박해오는 데에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동생들을 시켜서 황씨를 해칠 것이나, 대신 동생들을 최대한 선처해달라’고 부탁했고, 박 검사는 그에 대한 약속으로 혈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에 대해서 박 전 검사는 지난 9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씨측이 그렇게 주장하면 그쪽 시나리오는 그렇게 정리하고, 난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니 그걸로 정리해달라”고 반박한 바 있다.)
▲내가 법정에서 재판관에게 말했다. 혈서와 녹음 테이프 진본을 모두 보관중인데, 죄송하지만 그 진본은 내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냥 내줄 수는 없다. 솔직히 검사를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혈서 복사본은 내봐야 혈흔 감정을 할 수 없으니 소용없는 것이고. 테이프는 아직 녹취록을 작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증거 자료 제출을) 다음에 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혈서 존재 자체에 대해서 박 전 검사는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현재 어디에 보관중인가. 그리고 언제 공개할 것인가.
▲분명히 말하건데, 내가 진정으로 석방되게 되면 모든 진실을 다 고백한다는 차원에서 그 첫 일성으로 이것을 공개할 것이다. 장소를 하나 마련해서 기자회견식으로 할까 생각중이다. 약속한다. 당시 혈서는 그와 내가 한자로 ‘신의’라는 두 글자를 한 자씩 썼다. 녹음 테이프와 함께 땅 속에 묻어 두었는데, 어제 꺼내 보았더니 그대로 잘 있더라.
─86년 당시엔 잠자코 있다가 왜 18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폭로하는 건가.
▲박 검사를 그래도 믿었다. 또 건달들은 의리와 충성을 생명처럼 중시 여기기 때문에…. 당시 이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5년 선고를 받고 수감됐지만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에 들어가 있자니 밖으로부터 정말 참기 힘든 얘기들이 들려왔다. 당초 한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박 검사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 때문에 안에서 울화가 치밀고 스트레스를 받아 병을 얻었다.
89년에 폐암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나왔더니, (박 검사가) 한번 날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사과하더라. 내가 당시 너무 화가 나서 ‘진실을 꼭 밝히겠다’고 했더니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시늉까지 했다. 당시 상황은 친구인 (손)하성이도 봤고, 여성지의 한 기자도 보고 이를 기사화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0년에 다시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 들어오게 됐다. 난 10년을 살았고, 그와 관련된 사건으로 남은 형량 3년 6월도 참고 살았다. 하지만 보호감호 7년만큼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 검사에게 제발 약속을 지켜달라고 안에서 수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그는 냉정히 거절했다.
▲ 86년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으로 압송되는 김태촌씨. | ||
▲당시 5공 정권에 의해서 보호감호법이란 것이 생겨났다. 86년 박 검사에게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제시했던 것 중에 하나가 ‘혹시라도 나까지 걸려 들어가게 되면 난 틀림없이 보호감호법에 걸리게 되어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더니 그가 ‘당신이 걸릴 리도 없겠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책임을 지고 감호법은 반드시 빼주겠다’고 했다. 보호감호는 판사가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신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검사의 재량이 절대적이었다.
내가 안에서 보호감호판결 재심을 청구하면서 박 전 검사에게 편지를 써서 부탁했다. 날 도와달라.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날 위해 증언을 써 달라고 몇 차례 간곡한 편지를 넣었으나, 그는 인편을 통해 오히려 내게 ‘협박과 명예훼손죄’ 운운했다. 당시 박 검사 사주의 진실을 밝혔으면 난 5년형을 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를 위해 내가 7년의 보호감호까지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법정에서 폭로하게 된 것이다.
─검찰과 경찰뿐만 아니라 정치권 등 소위 말하는 권력실세와 가까웠다는 소문이 많았다. 심지어는 90년 범죄와의 전쟁으로 다시 구속될 때도 당시 안기부에서 사전에 협조를 요청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건 사실이다. 무척 중요한 얘기니까, 그 얘기는 천천히 하자. 다음에. 검찰과의 관계니, 또 안기부와의 관계니… 감출 생각도, 감출 이유도 없다. 안기부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으니까… 하나하나 나와 관련된 여러 의혹들과 밝혀지지 않은 얘기들을 모두 털어놓을 것이다.
─특히 6공 실세였던 안기부 간부 엄아무개씨와는 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절친했다고 하던데.
▲그것도 사실이다. 일단 오늘은 절친했다는 정도로만 얘기하겠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김씨는 인터뷰 도중 5~6공 권력 실세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스러워 했으나, 언뜻언뜻 관련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86년 박 검사의 부탁으로 내가 뉴송도호텔 나이트 경영을 맡게 됐을 때 관할 경찰서장 구청장 등이 모두 와서 굽신거렸다. 5공 당시 최고 실세였던 장아무개씨 전화 한 통화면 안되는 게 없을 때니까…”라고 말했다.
그해 6월 전국 주먹들이 한강 둔치에서 가진 ‘새마을 축구대회’ 행사에 대해서도 “당시 박 검사가 새마을 조기축구회 회장을 맡으면서 새마을중앙회장을 맡고 있던 전경환씨와도 친했던 모양이다. 당시 행사에 전씨도 오고, 또 김아무개 의원 등 정치인들이 많이 오고 여기저기서 금일봉을 보내오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권력의 혜택도 누렸지만 이용도 많이 당하지 않았나.
▲86년 구속된 이후 안기부에 끌려가서 3~4일 동안 말로만 듣던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그들은 내 입을 통해 김대중 김상현 등 호남쪽 야당 정치인들과 관련해서 어떻게 하든 하나를 엮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내게 뉴송도호텔사건을 없애 줄 테니까 야당 국회의원 몇 명만 물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후 내가 축구대회 행사 때 금일봉을 전달했던 야당 의원들 봉투를 급하게 모두 찢어 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92년에 김씨와 정·관계 인사들의 ‘관계’가 소상히 기록된 측근의 일지가 언론에 공개된 이른바 ‘비망록 사건’이 터지면서 큰 파장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 중요한 내용이 담긴 것은 그 후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도난당했다는 얘기도 있고, 당시 비망록의 작성자인 구아무개 목사가 갖고 잠적했다는 얘기도 있고, 소문만 무성하다.
▲구 목사가 잠적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 필리핀에서 선교사업을 벌이고 있다. 나와도 편지를 통해 자주 연락한다. 비망록은 나도 봤지만 당시 구 목사가 날 비방하려던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목사로서 당시 날 전도시키고 또 내 차 운전기사 역할을 하면서 항상 함께 있었는데, 목사이다 보니 그날 그날 일을 일기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그걸 우연히 발견한 한 기자가 복사해가서 공개해버린 것이다.
후편이 도난당했다고 하는데,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당시 언론사들이 집 한 채 값까지 제시하며 접근하자 구 목사가 일부러 공개 않고 있다는 얘기도 있고, 또 그가 현재 필리핀에서 후편을 준비중이라는 얘기도 있고….
(당시 비망록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그 후편에 진짜 권력 실세와 관련한 굵직한 내용들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해지자, 구 목사는 “도난당했다”고 신고했던 바 있다. 이후 지금까지 그 후편의 내용과 실체에 대해서는 갖가지 의혹과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
─후편의 내용을 대충 아는가. 안기부와 한때 대권주자로 떠올랐던 김아무개씨 관련 얘기 등이 있다고 하는데.
▲나도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그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지… 안기부 얘기라 해봐야 당시 내가 안기부 비표를 달았다는 정도… 그리고 김아무개씨 얘기는 이렇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대권을 놓고 상당한 경쟁을 할 때, 우리가 김씨측에 서서 후원회도 참석하고 그랬다.
─혹시 최근 옛 부하들의 소식이나 안부는 좀 듣는 편인가.
▲나 여기 한 달간 있으면서 범서방 조직이라는 사람들 단 한 명도 전화하거나 연락하지 않았다. 설사 그들이 연락하고 싶다고 다른 사람 시켜서 얘기를 전해와도 내가 딱 잘랐다. 그러면 다시 또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겠나.
내가 지금 뉴송도호텔 사건의 진실을 법정에서 폭로하고 이후 하나하나 진실을 밝히겠다고 준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이제 이 세계를 완전히 은퇴한다는 내 결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더 이상 이 세계에 미련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면 한번 비밀은 무덤 끝까지라도 안고 가야 한다. 그게 보스다. 하지만 이제 난 더 이상 보스니 조직이니 하는 데 미련이 없다. 그래서 훌훌 다 털어놓는 것이다.
─몸 상태는 어떤가. 병원측으로부터 여전히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우선 숨 쉬기가 곤란하다. 폐 한쪽이 이미 없고, 남은 한쪽도 폐결핵이 두 번씩이나 걸려서…. 여기서 종합검진 받아보니까 갑상선에도 종양이 있고, 심장혈관에 또 고혈압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도 의사선생님 말이 몸 관리를 충실히 잘 하고, 일년 정도 요양하면 휠체어는 타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희망을 갖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만약 보호감호법이 폐지되어서 석방이 확정된다면.
▲지난 10월 말 인천순복음교회 최성규 목사님의 방문으로 집사 임명장을 받았다. 성경 공부에 더욱 더 힘쓰겠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대학에 들어가 ‘청소년선도학과’를 공부해서 청소년 선도와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던 청소년 시절 영웅심에 빠져서, 어린 마음에 보스가 되면 멋있겠다 하는 잘못된 생각 하나로 오늘날 한평생을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또 그나마 내가 소질이 한 가지 있는 것이 서예다. 서예를 본격적으로 한번 배워보고 싶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