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막부와 독도 담판
동래부 출신으로 홀어머니 아래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일찍이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으로 복무, 부산의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 하였다. 1693년(숙종 19) 동래어민 40여 명과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기 위하여 침입한 일본어민을 힐책하다가 부하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이때 호키주 태수와 에도막부에게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고 대마도주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쌀과 양과 베의 길이를 속이는 등 중간에 농락이 심한 것 등을 밝히고,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가지고 오는 도중에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그 외교문서를 빼앗겼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할 계획으로 다케시마 문서를 위조하여 같은 해 9월 대마도 사신을 동래에 보내어 안용복을 소환하는 동시에 예조에 보내어 조선의 어민이 일본의 영토인 다케시마에서 고기잡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좌의정 목래선과 우의정 민암이 비워둔 땅으로 인하여 왜인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좋지 않은 계책이라 하여 멀리 떨어진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조선정부의 공도정책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권하는 예조복서를 작성하여 동래의 대마도사신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에서 울릉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밝혀 두었다.
이듬해인 1694년 8월에 대마도주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예조복서를 반환하면서 울릉도라는 말을 빼고 다시 작성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영의정 남구만, 우의정 윤지완이 강경한 태도로 삼척참사로 하여금 울릉도를 조사하게 하고 접위관을 동래에 보내어 오히려 일본이 남의 영토에 드나든 무례함을 책하는 예조서계를 대마도 사신에게 전달하였다.
1696년 봄에 안용복은 다시 10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출어하여 마침 어로중인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송도까지 추격하여 우리의 영토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침범사실을 문책하였다. 또 울릉도우산양도감세관이라 칭하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범경의 사실을 항의,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의 허락 없이 국토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남구만의 만류로 귀양을 보냈다.
이듬해인 1697년 대마도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조선땅으로 확인한다는 막부의 통지를 보냈으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그의 활약으로 철종시대까지는 울릉도에 대한 분쟁은 없었다. 한 어부로서 나라의 일에 크게 공헌한 모범이 된다. 안용복의 생몰년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