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관 14:1 “독도는 한국땅” 탕탕탕!
▲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 심리 장면과 독도박물관에 있는 독도 모형 합성 사진. 로이터/뉴시스 국회사진기자단 | ||
현재 우리는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향후 전망은 썩 밝지만은 않다. 학계 일각에서는 “최대한 일본의 의도를 사전에 막아야겠지만, 최악의 경우 국제사법재판소까지 갈 수도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독도 전문가’인 국방대학원 김병렬 교수는 최근 <일요신문>에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에 관한 가상 시나리오를 보내왔다. 김 교수는 일찍이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고 이미 지난 2001년 6월에 <독도논쟁>(다다미디어)이란 저서를 통해서 ‘독도분쟁과 관련한 모의재판’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이 기고는 당시의 내용을 2005년 3월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이번 가상 재판 시나리오는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일본측의 주장 및 논리와 이를 통렬히 뒤집는 우리의 반박 논리와 근거 자료를 한눈에 꿸 수 있는 ‘독도 논쟁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향후 만에 하나라도 독도 문제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게 될 경우를 대비한다는 측면에서도 ‘모의재판’ 시나리오는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재판장: 지금부터 일본과 한국 두 나라 간에 벌어지고 있는 ‘작은 섬’에 관한 분쟁에서 각국이 주장하는 영유권에 대한 주장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문제를 최초 제기한 일본측 정부의 대리인부터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측 정부 대리인: 존경하는 재판장님, 배석판사님. 본인은 일·한 양국간의 오래된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선린관계에 긴장상태를 야기시키고 있는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평화적으로 처리하고자 일본국을 대표하여 발언하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고래로부터 아국의 영토였던 다케시마를 한국이 1952년에 우리 일본이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소위 ‘이승만라인’이라고 하는 국제법상 전혀 인정될 수 없는 일방적인 선을 선포하면서 무력으로 강점한 이래 아국의 즉각적이면서도 계속적인 항의를 무시한 채 오늘날까지 반환하지 않고 있습니다.
원래 다케시마는 1600년대 초부터 우리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기를 울릉도에 꽂고 다케시마를 중간기지로 활용하면서 1696년까지 80여 년간 한국의 조선국측으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평화적으로 벌목 및 어로 활동을 영위해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조선이 버려둠으로써 임자 없는 땅이 된 울릉도를 아국이 80여 년간 국가적인 소유의사를 가지고 평화적으로 점유함으로써 당시의 국제법상 일본의 영유권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국의 막부가 순전히 인접국인 조선과의 우호관계를 감안하여 울릉도를 양도했던 일이 있는데 여기에 더해서 오늘날 다케시마까지 자신의 영토라고 하는 한국측의 주장은 너무 과도한 요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 정부는 <숙종실록>의 안용복 사건 기록을 증거라고 하면서 당시 안용복이 울릉도와 다케시마를 조선영토로 확인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한국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울릉도를 양도한 사실 이외에 다케시마까지 함께 양도했다는 내용은 그 어떠한 기록에서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명백한 증거로 아국이 조선에 보낸 막부의 공문서에는 울릉도만 포함되었을 뿐, 다케시마는 언급조차 없습니다.
나아가 1887년에 아국의 외무성 차관 와타나베가 각의에 보고한 문서에 다케시마가 아국의 영토라고 분명히 명시한 점 등으로 미뤄볼 때 다케시마는 고래로부터 아국의 고유한 영토로 인식되어온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명백한 아국의 땅인 다케시마에 대하여 혹시 한국의 오해가 있을지 몰라 지난 1905년에 시마네켄 고시 제40호를 통하여 우리 일본땅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던 것입니다.
만약 당시 한국이 다케시마에 대한 영토의식이 있었다면 우리 일본에 당당히 항의를 했어야 하는데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국은 지난 1954년부터 한국에게 다케시마의 영유권에 관한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자신이 없기 때문에 차일피일하다가 이제야 마지못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판결에서 이점을 참작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 일본측 입장을 잘 들었습니다. 다음은 한국측 정부 대리인 말씀하십시오.
한국측 정부대리인: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석판사님.
본인은 한일 양국간에 긴장상태를 야기시키고 있는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여 발언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일본측은 마치 우리나라가 자신이 없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회피해온 것처럼 진술하였는데 이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중국과 분쟁을 빚고 있는 조어도 문제를 제소하지 않고 있습니까? 일본측이 말한대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까?
일본이 조어도 문제를 재판소에 제소하지 아니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바 없지만,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의 영토임이 명백한 독도문제를 구태여 재판소에 가지고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최근 여러 가지 이유로 한일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 문제를 비롯하여 하나하나 일본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부득이 재판소에 심리를 부탁하게 된 것입니다.
독도가 이미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영토임을 알려주는 사료들은 적지 않습니다만 먼저,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적 점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측의 논리가 얼마나 억지인지를 지적하려 합니다.
평화를 사랑했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일본에 의한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왜구가 해안지방을 약탈하여 이로 인한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당시 조선 조정이 울릉도의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게 되자 이 틈을 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어로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1618년에는 앞서 일본측에서 주장한 대로 막부에서 자국의 어부들에게 도항권을 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항권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외국을 갈 수 있는 증명서를 말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나갔던 안용복과 일본 어부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받은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순리대로 울릉도를 조선으로 돌려주라는 결정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일본측에서는 이때 울릉도만 돌려주었을 뿐이지 독도까지 돌려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당시 안용복이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까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한 사실이 한국의 사료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료에도 명백히 나옵니다. 당시 막부의 회의록에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까지 언급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록 조선으로 보낸 막부의 공문서에 독도가 누락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독도까지 반환한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그후 일본의 어부들이 막부의 지침에 따라 울릉도는 물론 독도까지 왕래를 금했던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일본측은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가 일본의 땅임을 각국에 알렸다고 하는데 당시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는 어떤 나라입니까?
당시 독도가 한국의 영토였다고 하는 사실은, 1906년에 아국의 울릉군수였던 심흥택이 일본이 독도를 편입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본군 소속의 독도를 일인들이 편입했다고…’라고 지적하며 대책을 세우도록 요청하는 보고서를 중앙 정부에 보낸 것을 보아도 명백하다고 할 것입니다. 심흥택이 최초로 편입 사실을 알게 된 1906년은 1905년의 을사조약에 의하여 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이 외교권을 박탈하여 항의를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후에 항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편입조치를 묵인한 것이라고 일본측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905년 이후의 어업면허에 의한 실효적인 지배라고 하는 부분도 불법행위에 의한 원인무효의 주장인 것입니다. 전후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군최고사령부가 훈령 677호에 의해서 독도가 한국 땅임을 엄연히 인정한 사실도 그 증거라 할 것입니다.
재판장: 양국의 입장을 잘 들었습니다. 다음은 양국 정부 대리인의 주장에 관해서 각각 변호인의 변론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측 변호인: 아국 정부는 1905년 5월 정부 소유지로 다케시마를 토지대장에 기입한 후 1941년 전쟁으로 보류되기 전까지 어업 활동에 관한 면허를 계속 부여하였습니다. 그간 면허자로부터 매년 토지 사용료를 받았으므로 이를 실효적으로 점유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은 전후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군최고사령부 훈령 제677호에 의해서 독도가 한국땅임을 연합국이 인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이 훈령의 제6항을 보면 ‘이 훈령의 어떠한 규정도 섬들의 최종 결정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 후 영토문제를 확정하는 평화조약인데 1951년에 서명된 6차 초안인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에 의하면 독도는 아국의 땅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모든 섬들을 강화조약에 기술하는 것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문안에는 섬들을 조약에서 삭제하게 됩니다. 따라서 연합국이 다케시마가 한국의 것이라고 인정했다는 한국측의 주장은 잘못된 근거에 의한 잘못된 주장입니다.
한국측 변호인: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과 관련하여 당시 미국은 독도가 한국 땅인지 일본 땅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최초에는 한국 땅으로 표기하였다가 당시 미국의 주일특사 시볼드를 앞세운 일본측의 주장에 의해 우왕좌왕하게 되었던 것이고, 최종적으로 강화조약에서 아예 삭제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측은 당시 강화조약에 대해 ‘일본은 제주도와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는 조항 해석에 대해서 위 3개 섬이 모두 한반도의 최외측에 있는 섬이므로 독도는 당연히 제외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통상적으로 다만 큰 섬을 상징적으로 표기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남쪽 제주도 밑에 있는 마라도도 일본 땅이란 말입니까?
따라서 대일강화조약에 의해서 연합국측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했다고 하는 일본측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왜곡이라고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에 병탄되기 전에 독도를 평화적으로 관리하였고, 광복 후에도 군인이 아닌 경찰에 의해서 지난 60여 년간 평화적으로 관리하여 왔으며, 특히 1954년에 등대를 설치하여 오늘날까지 부근을 항해하는 세계 모든 선박 특히 일본 선박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참작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재판장: 최종 결론을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일본과 한국이 해결해주도록 부탁한 ‘작은 섬’의 영유권 문제에 관하여
1. 대한민국이 독도를 강점해 왔다는 일본측의 주장은 현재 대한민국이 소수의 경찰을 주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력 강점 의사보다는 해상사고 및 독도 방문객의 효율적인 통제를 위한 것이라고 할 것인 바 이유없다고 할 것이며,
2. 안용복의 활동에 의해 울릉도를 조선으로 반환할 당시 울릉도만 반환하였을 뿐 독도까지 반환한 것은 아니라는 일본측의 주장은 울릉도 반환 이후 다시는 독도 근처에서 어로작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독도까지 함께 반환한 것이 분명하다는 한국측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고,
3. 시마네현 고시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이 항의를 하지 않아 이를 묵인한 것이라는 일본측의 주장은 시마네현 고시가 중앙정부의 고시도 아니었고, 편입을 처음으로 알게 된 1906년 당시에는 한국측이 효과적으로 항의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한국측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으로 재판소는 인정하였으며,
4.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과 관련해서는 당시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측의 그 어느 나라도 독도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바 이에 의한 영유권 판단에 대한 양국의 주장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고,
5. 1954년 이후 한국측에서 등대를 설치해 근처를 항해하는 선박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었으며, 특히 일본의 선박들도 아무런 이의없이 이를 이용하는 등 통상적으로 한국이 독도를 실질 소유해온 점이 인정되므로 본 재판소는 재판관 14대 1로 독도 영유권이 대한민국측에 있다고 판결합니다.
20△△년 △월△일 헤이그의 평화궁에서 불어와 영어로 작성되어졌으며, 불어본이 정본이다. 3개의 부본 중 하나는 재판소 문서고에 보관될 것이며 기타의 부본은 각각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에 전달될 것입니다.
▲ 김병렬 교수 | ||
197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국방대 국제관계학 교수를 맡고 있다.
KBS 독도 관련 프로그램 자문교수로 활동했으며 <독도 논쟁>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 <독도냐 다케시마냐> <독도 자료총람>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