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치기보다 몸 낮추기로 힘 비축
▲ 최고의 사정기관으로 군림했던 검찰이 되레 개혁의 대상이 되면서 김종빈 신임 총장의 험난한 ‘항해’가 예고된다. | ||
‘위기’의 분위기는 지난 18일 김종빈 검찰총장이 재경지역 중간간부들로부터 전입 신고를 받으며 했던 훈시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김 총장은 이날 훈시에서 현재 검찰이 처한 상황에 대해 “검찰의 수사 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며 운을 뗐다. 그는 “법원은 공판중심주의를 주장하고, 경찰은 검찰의 수사지휘를 안 받겠다고 하고, 정치권은 검찰이 중립적이지 않다며 또 다른 수사기관을 만들려 하는 등 검찰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김 총장의 훈시는 준비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흥연설식이었다. 그만큼 가슴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는 것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전입 신고식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던 것은 물론이다.
실제 최근 검찰이 처한 주변 환경은 건국 이래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지난해 사법개혁위원회에 이어 올해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로 이어지고 있는 각종 사법절차의 개편은 검찰의 위상과 권력을 크게 흔들고 있다.
공판중심주의를 이유로 검찰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는 휴지조각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2007년부터 시작될 참심·배심제 형식의 국민참여재판은 수사만 잘하면 되던 검찰에게 재판정에서 피고인측의 논리를 이겨내고 판사뿐만 아니라 참·배심원들까지 설득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안겨주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법정에서 피고인 신문조차 없애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수사과정의 변호인 입회’ 같은 각종 피의자 인권 보호 방안도 검찰의 수사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이 같은 사법절차의 변화는 과거 피고인보다 한 단계 높은 자리에 있던 검찰을 피고인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검찰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위상의 추락이다보니 반발도 크다. 기획통의 한 검사는 “검찰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며 “법원과 시민단체 등이 마치 공판중심주의를 지고지순의 선인 양 몰아가고 있지만 사실 국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소지도 많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검찰이 ‘저항’할 수 있는 선을 넘어간 듯하다.
경찰과 다투고 있는 수사권 조정 문제도 검찰을 애태우게 하고 있다. 경찰은 이번 기회에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넘겨받겠다며 청장까지 직접 나서는 등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경찰 수사권 독립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하다. 검·경 수사권 조정 협의체가 만들어진 지 6개월이 넘게 버티고는 있지만 검찰의 입장이 점점 더 불리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검찰권은 2003년 서울지검이 당시 여당 대표였던 정대철 전 민주당 의원을 굿모닝시티 비리와 관련해 구속시키고, 이어 대검 중수부가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여야 거물급 현역의원들을 줄줄이 구치소로 보내면서 최전성기를 맞았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당시의 화려했던 수사는 마치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에 화려한 불꽃을 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공수처가 설립되면 이 같은 거물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는 검찰의 손을 벗어나게 될 공산이 크다. 국정원이나 청와대 등으로 들어오는 고급 정보들이 검찰보다는 공수처 쪽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주목하는 대형수사를 공수처에 빼앗기게 되면 검찰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공수처는 검사들마저 수사 대상으로 삼고 있어 검찰의 직접 겨냥하는 비수가 될 수도 있다.
여권의 검찰에 대한 압박은 지난 21일 있었던 법무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표출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공수처 설립의 불가피성을 얘기하며 “검찰은 과거의 기득권과 습관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며, 검찰이 갖고 있는 ‘제도 이상의 권력’을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내놓을 것은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불필요한 권력은 스스로 내놓아야 쫓기는 조직이 되지 않고 앞서가는 조직이 될 수 있다”며 “이것을 일찍 수용하면 즐겁게 일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가는 일도 즐겁지 않게 되고 마지막에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만 남기게 된다”고 덧붙였다. 마치 검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메시지처럼 들린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사방에서 압박이 들어오다 보니 김종빈 총장은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으로 살길을 찾으려는 듯하다. 김 총장이 취임식부터 줄곧 ‘인권존중’과 ‘국민에 봉사하는 자세’, ‘개혁에의 동참’ 등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차원이다. 법원과 정치권, 경찰과 시민단체가 검찰을 불신한다면 직접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만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최근 검찰이 처한 어려움은 남 탓이 아닌 그동안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 검찰 탓”이라며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있다.
이 같은 김 총장의 수세적인 자세에 대해 검찰 내부에선 불만도 흘러나온다. 검찰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인권존중만 강조하면 검찰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거대 사회악의 척결’은 어떻게 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결국) 정권의 코드에 맞추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김종빈 총장도 이 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18일 훈시에서 “인권존중을 강조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수사는 소홀히 해도 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인권존중과 수사, 양자를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는 얘기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고 토로했다. 흔들리는 내부 조직을 다잡으려는 굳은 의지를 보이는 듯 김 총장이 이 부분을 언급할 때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김 총장은 이날 “가장 오래 살아남는 생물은 가장 강하거나 똑똑한 생물이 아니라 환경에 잘 적응하는 생물”이라는 말로 훈시를 마무리했다. 그의 언급처럼 검찰이 ‘개혁’이라는 시대의 화두에 부응해 과거의 위상을 지켜내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