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대신 홍보 강화 ‘전직들’ 실패 오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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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최근의 인사 실패에 대해 소극적인 유감 표명조차 하지 않았다. 반성과 쇄신 대신 홍보 강화를 통한 역공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6월 30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박 대통령. 사진제공=청와대
박 대통령이 “국정 공백과 국론 분열이 심화되고 혼란이 지속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고심 끝에 정 총리 유임을 결정했다”고 언급할 때만 해도 기대했던 뭔가가 나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인사권자로서 이번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박 대통령은 오히려 “총리 후보자의 국정 수행 능력이나 종합적인 자질보다는 신상털기식, 여론재판식 여론이 반복돼서 많은 분들이 고사를 하거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현행 인사 청문회 제도에 개선할 점이 없는지를 짚어보고,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제도 개선 방안을 모색해 주기 바란다”며 책임회피성 발언만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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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통합 청주시 출범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7월 1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박 대통령을 수행하고 돌아온 안종범 경제수석이 마이크를 잡았다. 박 대통령이 행사 참석 후 청주 서문시장과 삼겹살 거리 등 민생경제 현장을 둘러보고 온 사실을 브리핑하기 위해서였다. 안 수석은 “세월호 참사(4월 16일) 이후 대통령께서 재래시장 등 민생 현장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박 대통령이 서민경제 살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음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부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현장 방문을 즐기는 스타일. 하지만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잦은 민생현장 방문 결과를 경제수석이 직접 브리핑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청와대는 이날 박 대통령의 민생 행보를 설명하기 위한 별도 보도자료까지 배포했다.
# 장면3
이튿날인 7월 2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오전 브리핑에 나선 민경욱 대변인이 일부 조간신문에 실린 청와대 인사 기사에 대해 입을 열었다.
“국정홍보비서관에 천영식(<문화일보> 전국부장), 뉴미디어비서관에 민병호(<데일리안> 대표). 이 분들이 내정됐다는 기사들이 났던데, 인사 문제는 확정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말씀드릴 게 없다.”
보도 내용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들도 두 사람의 내정은 시간문제라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친박계 정치인 출신의 이정현 전 홍보수석이 물러난 자리에 YTN 기자 출신의 윤두현 수석이 배치된 데 이어 대선캠프 출신의 백기승 전 국정홍보비서관이 물러난 자리와 신설되는 뉴미디어비서관 자리에도 기자 출신이 기용된 것이다. 이로써 홍보수석실 내에서 비서관급 이상 6명 중 최상화 춘추관장을 제외한 5명이 기자 출신으로 채워졌다.
얼핏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별적인 장면들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하나로 엮이는 대목이 있다.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재연된 ‘인사 참사’로 취임 후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몰린 박 대통령이 현 국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전략과 전술로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련의 상황 전개에서 감지되는 첫 번째 포인트는 박 대통령이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6월 3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최근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GOP(일반전초)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 “잊을 만하면 터지는 군부대 사고로 군대에 자녀를 보낸 부모들이 느낄 부담감을 생각하면 참으로 송구스럽다”며 유감을 표했다. 반면 이 사건보다 박 대통령 자신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는 최근의 인사 참사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수준의 유감 표명조차 없었다. 오히려 국회, 인사청문회 제도, 높아진 국민의 눈높이 등 ‘탓’을 늘어놨다. 박 대통령이 최근 잇단 인사 참사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박 대통령의 태도는 청와대 관계자들도 당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한 청와대 행정관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워낙 여러 번 대국민 사과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뭔가 사과나 유감 표명이 있을 줄 알았다”며 “엄밀히 말하면 세월호 참사나 GOP 총격 사건은 대통령이 직접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은 아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쉽게 사과하면서 직접 책임이 있는 인사 사고에 대해서는 아무 입장 표명이 없다는 점은 의아하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와 연결되는 두 번째 포인트는 청와대의 홍보 강화 기류다. 현 청와대는 비서관은 물론 수석들조차 출입기자들의 전화를 받지 않고, 심지어 일부 인사는 재직기간 동안 기자들과 식사 자리 한 번 안 갖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언론 입장에서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정권인 셈이다. 그런 청와대가 시키지도 않은 브리핑을 하고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최근 안종범 수석은 박 대통령이 글로벌 기업 회장을 접견한 일정에 대해서도 브리핑을 한 적이 있다”며 “전체 대통령의 일정으로 볼 때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접견이나 현장 방문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으로 홍보하려는 모습은 전에는 찾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기자 출신들을 줄줄이 발탁하는 것도 이런 홍보 강화 기류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특히 현직 기자들이 공백기도 없이 곧바로 청와대로 자리를 옮기고 있는 게 두드러진 특징이다. 윤두현 수석은 YTN 부국장, 김진각 홍보기획비서관은 <한국일보> 부국장, 천영식 국정홍보비서관 내정자는 <문화일보> 전국부장, 민경욱 대변인은 KBS 문화부장, 민병호 뉴미디어비서관 내정자는 <데일리안> 대표에서 단번에 청와대로 갈아탔다. 출신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 각 언론사의 현직 부장과 국장 등과 친분이 있고, 그만큼 이들에 대한 영향력도 갖고 있는 사람들로 봐야 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박 대통령이 최근의 정치적 위기의 원인을 자신의 잘못된 국정운영이 아니라 잘못된 홍보, 특히 제도권 언론은 물론 인터넷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등에서의 여론전 실패에서 찾고 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박 대통령이 처절한 반성, 그에 기반한 뼈를 깎는 자기 쇄신이 아니라 홍보 강화를 통한 역공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보수신문들과 대립했다. 2007년 6월 ‘언론인과의 대화’ 장면.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의 본질은 제쳐두고 여론전 강화에만 매달렸던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랬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소위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으로 불리는 보수 신문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후에도 제도권 언론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이어갔다. 이들 언론이 자신과 국민들 간의 소통을 왜곡하고 방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의 개혁 구상을 흔드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치부한 것이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제도권 언론과의 관계 개선은 제쳐두고 인터넷을 통한 국민과의 직접 소통에 많은 공을 들였다. 급기야 ‘국정브리핑’이라는 일종의 인터넷 언론과 유사한 정책홍보 사이트를 만들어 국민들을 상대로 직접 정책홍보를 시도하기도 했다. 국정브리핑에 제도권 언론의 보도 내용을 열심히 비판하고 반박한 공무원이 좋은 평점을 받고, 이런 분위기 속에 공무원들이 이 사이트에 접속해 글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되는 씁쓸한 일들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에 출입했던 한 전직 기자는 “노무현 정부 초기의 정치적 위기는 보수 세력의 대선불복 심리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무시할 수 없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수도 이전과 같은 민감한 정책들을 제대로 된 전략도 없이 밀어붙인 데에도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론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과 노력은 없이 반대자들을 무조건 반개혁으로 몰아붙인 게 결과적으로 거의 망했던 야권, 즉 현 여권을 되살려주는 역풍을 낳았다”고 회고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방송사 사장들을 친정부 인사들로 채우는 과정에서 언론계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왼쪽은 2009년 11월 ‘대통령과의 대화’에 출연한 이 전 대통령, 오른쪽은 2010년 3월 MBC 노조의 김재철 사장 출근저지 투쟁. 연합뉴스·일요신문DB
이명박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2008년 취임한 지 100일도 채 안된 시점에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라는 무시무시한 역풍에 시달렸던 이명박 정부는 언론 장악, 특히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큰 방송사들에 대한 영향력 강화에 주력했다. 방송사 사장들을 친 정부 인사들로 채우는 과정에서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됐던 MBC뿐 아니라 KBS와 YTN까지 장기 파업 사태에 빠져들었다.
새누리당의 한 고참 당직자는 “‘좌파에게 장악된 방송을 정상화시키겠다’는 취지로 달려들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출범 당시 리버럴한 이미지였던 이명박 정부가 ‘수구꼴통’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 역시 촛불시위의 원인을 이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맞춘 무리한 쇠고기 협상에서 찾지 않고 여론전 실패에서 찾은 결과였다.
거센 비판 여론이 이는 이유를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닌 왜곡된 정보 때문이라고 여겼던 과거 정부들은 그로 인해 더 큰 시련에 봉착했다. 아무리 비판을 해도 들어먹지 않는 정부로 낙인찍히면서 반대세력이 점차 조직화되고, 결과적으로 이들 반대세력이 주요 정책 추진 과정에서 사사건건 발목을 잡게 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시도하고 있는 위기 탈출 전략에 대해 여권 인사들조차 우려를 감추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