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소통하면 ‘정치의 길’ 보인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을 연기한 배우 조재현. 사진제공=KBS
“장관은 요즘 드라마 ‘정도전’도 안보나?”
지난 6월 16일,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 자리에서 황교안 법무장관을 향해 쏘아붙인 말이다. 발언의 요지는 고려 말 혼란기 당시 왕을 향해 돗자리를 펴고 상소를 올리는 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을 빗대, 대통령이 잘못하면 관료로서 이를 제지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에 대한 충성이 필요한 시대이자, 동시에 도탄에 빠진 민생을 살펴야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도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지난 5월 19일, 6·4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 “드라마 <정도전>에 등장하는 정도전과 정몽주 스타일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내놓은 답이다. 시대정신에 대한 박 시장의 고민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요즘 정치인들, 드라마 <정도전>을 안 봤다면 얘기도 안 통한다. 앞서 예에서도 알 수 있듯, 공식 석상에서도 <정도전>은 곧잘 인용된다. 현 정치 시류를 비판하는 평론가와 학자들 역시 요즘 <정도전>의 한 대목을 주요 소재로 쓰고 있을 정도다. 기자가 만나는 의원들과 보좌관들 사이에서도 <정도전>은 주요 이야깃거리다. 야권의 한 당직자는 드라마 <정도전>을 두고 현재의 친박계를 말한다. 이런 식이다.
“드라마 <정도전>을 봐라. 정도전이 건국에 앞서 이인임을 넘었지만, 조선을 세우고도 이방원을 보지 못했다. 역사 속 개국공신들 대부분 이러한 절차를 밟았다. 친이계의 운명도 그랬지만, 지금 친박계 주요 인사들도 다 마찬가지다. 다음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친박계에서도 핵심으로 꼽히는 이정현 전 홍보수석은 현명한 거다. 아무리 개국공신이더라도 다음을 위해 숙이고 또 숙인다.”
요즘 정치권 내에선 ‘이인임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이인임은 실제 역사적 인물이자, 드라마에서 배우 박영규가 열연한 정도전의 정적이다. 고려 말을 지배한 수구파의 실권자인 이인임은 능글능글한 정치 9단의 원형이다. 평소 웃음을 잃지 않다가도 정도전을 내쳤듯 결정적인 순간 서슬파란 발톱을 드러낸다. 이에 빗대 도무지 속을 보이지 않으면서 온갖 술수로 무장한 현재의 중진들의 행태를 두고 ‘이인임스럽다’는 신조어를 쓰고 있다. 실제 드라마 작가는 이인임을 두고 현재의 중진 모습을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드라마 속 장면들. 옥에 갇힌 정도전(왼쪽)과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는 모습.
그런가 하면, 최근 야권의 한 초선의원은 당내 보좌관과 출입기자들을 섭외해 공부 모임을 만들 참이라고 밝혔다. 이 의원은 “아직은 준비 단계지만, 마음 맞는 사람만 모이면 ‘삼봉집’을 교과서 삼아 공부 모임을 만들고자 한다”며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게 깊은 울림을 줬다. 나도 이제 막 시작하는 입장이지만, 결국 삼봉이 강조한 ‘민본’이 지금 현세 정치에서도 답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 초선의원이 밝혔듯, 최근 국회 내 일고 있는 삼봉 열풍의 본질은 결국 그가 강조한 ‘민본’의 커다란 울림이다. 이 울림이 큰 것은 드라마가 그렸던 당시 상황이 현재 정치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공교롭게도 드라마 <정도전>을 쓴 정형민 작가는 지난 2001년부터 2010년까지 국회에서 보좌관을 역임한 정치권 출신 인사다. 정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대본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10년간 국회에서의 경험이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쩌면 현실 정치를 경험한 작가의 영향 탓인지 모르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역사적 캐릭터를 놓고 보자면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다. 정도전을 사지로 내몰았던 이인임도 부패했지만, 국가관만 놓고 보면 진정성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성계 역시 정몽주의 ‘역심’을 묻는 질문에 왠지 모를 불확실성이 느껴진다. 한때 동지였던 정도전과 정몽주도 명분 속에서 갈등관계를 그린다. 이방원에게 있어서 정도전은 개국공신 이전에 이미 실권을 쥔 기득권층일 뿐이다. 지금의 여야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더 현실성이 느껴진다. ‘삼봉의 21세손’ 정봉주 전 의원은 ‘삼봉 열풍’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어떤 정치인이나 처음부터 권력과 재력을 탐하진 않는다. 누구나 국민의 삶을 고민하고 국민이 온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그런 국가를 건설하고 지켜내는 것이 원래의 꿈이었을 터다. 그러다 삼봉으로 인해 탐욕의 정치에 매몰돼 초심을 잃고 헤매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잠시 잊고 있던 꿈을 찾았기에 많은 정치인들이 열광한다.”
드라마 속 정도전은 죽기 전 이방원에게 “이 나라 모든 성씨를 합쳐서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백성이다”라고 외친다. 600년 전 이 외침이 지금에서 더욱 깊게 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