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열쇠’ 부러뜨릴라 조심조심
▲ 지난 6월16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기 위해 대검을 나서고 있다. 김 전 회장은 건강 악화로 지난 1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6월14일 5년 8개월의 해외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대검 중수부의 수사를 받던 김우중 전 회장이 결국 지난 15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김 전 회장이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거처가 서울구치소의 1.5평짜리 독방에서 최고급 병원의 25평짜리 특실로 바뀐 것이다. 이에 따라 김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및 해외도피 배경, 재산은닉 등 국민적 의혹 사항에 대한 검찰 수사에 막대한 차질이 예상된다.
검찰은 입원이 장기화되면 ‘출장조사’까지 벌이겠다는 입장이지만 검찰 주변에서는 사실상 김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대우 패망을 둘러싼 비밀이 김 전 회장의 입원과 함께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갇히고 말지도 모를 상황이다.
지난 한 달 동안의 검찰 수사는 김우중 전 회장의 ‘건강’과의 싸움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우 관련 사건 자체가 워낙 오래됐고 당시 금융자료 등도 대부분 폐기돼, 실질적으로 검찰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김 전 회장의 ‘입’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 전 회장의 입을 여는 데 직결되는 그의 건강상태는 수사의 핵심 변수일 수밖에 없다.
사실 김 전 회장의 현재 몸상태는 ‘움직이는 종합병동’이라 할 만한 정도다. 우선 해외도피 생활 중 네 차례나 수술을 받은 심장질환이 가장 심각하다. 이로 인해 심근경색과 협심증이 생겨 가슴이 답답하고 식은땀이 나며 기운이 빠져 탈진하는 상태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 전 회장은 응급 심장약을 항상 휴대하고 검찰 수사를 받았다.
또 과거 위암 수술로 위의 대부분을 절제한 후 발생한 장협착증은 식사를 제대로 못하게 하고 탈수 증세까지 일으키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69세의 고령인 데다 오랜 해외도피 생활로 피폐해진 심신, 귀국 후 계속되는 수사로 쌓인 스트레스는 증세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김 전 회장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검찰 수사도 무척 조심스럽게 진행돼 왔다. 실제 귀국 초기 하루에 10시간씩 김 전 회장을 조사하던 검찰은 최근 조사시간을 8시간으로 줄였다. 김 전 회장이 건강에 이상을 호소하면 수사를 즉시 중단하고 구치소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이 소환돼 조사를 받던 서초동 대검청사 주변에는 아주대병원 앰뷸런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항시 대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김 전 회장은 끝까지 구속수사를 받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의 건강에 속이 타는 것은 정작 본인보다 검찰일 수밖에 없다. 2003년 8월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투신자살을 한 것을 비롯, 몇몇 유명 피의자들의 자살로 곤욕을 치른 검찰에게 김 전 회장이 조사를 받던 중 ‘불상사’라도 발생한다면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김 전 회장 본인은 쓰러질 때까지 조사받겠다고 하지만 쓰러지면 큰일이기 때문에 아프면 미리미리 이야기해달라고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검찰은 김 전 회장의 건강 상태로 인해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검찰의 노이로제 반응이 밖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예가 지난 8일 발생했다.
검찰은 이 날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오전 9시 서울구치소에서 김 전 회장을 불러 대검 청사에서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은 장협착증을 호소하며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거의 탈진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놀란 검찰은 오후 5시30분쯤 조사를 중단하고 김 전 회장을 곧바로 서울구치소 의무과장에게 보내 진단을 받도록 했다.
그러고 난 뒤 검찰은 이 같은 상황을 곧바로 언론에 알렸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을 서울구치소로 보내면서 상태가 당장 병원에 입원하거나 또는 수술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무리한 수사” 등 언론의 질타가 터져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하게 상황을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당시 이 같은 소식을 언론에 전하는 검찰 관계자의 목소리는 상당히 긴박했다.
이에 기자단도 놀란 것은 물론이다. 언론사들에 즉시 비상이 걸렸다. 김 전 회장의 입원을 기정사실화하고 서울구치소는 물론, 당시만 해도 김 전 회장이 입원할 것으로 예상됐던 수원 아주대 병원으로 취재 및 카메라 기자들이 대거 몰려갔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이 서울구치소에 도착한 지 한참이 지나도 병원에 입원한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궁금해진 기자단은 검찰측에 김 전 회장의 상태를 계속 추궁했으나 검찰은 당분간 상태를 봐야 한다는 답변만 되풀이 했고 기자단은 밤늦게까지 구치소와 병원 앞에서 철수를 하지 못하고 무작정 대기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시간에 김 전 회장은 구치소 병동에서 상태가 호전돼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고 편안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자라 보고 놀란 검찰이 솥뚜껑 보고도 놀란’ 셈이다.
이처럼 검찰의 애를 태우던 김우중 전 회장의 건강상태는 결국 지난주 들어 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김 전 회장의 입원은 검찰 수사에 ‘치명타’로 작용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아프기 전까지는 해외도피 배경 등 각종 의혹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됐었다”며 “그러나 몸이 아프니 모든 상황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그동안 각종 압박수단과 회유책을 동원, 국민적 의혹 사항을 털어놓도록 김 전 회장을 설득해 왔던 검찰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특히 검찰이 그동안 피의자들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집요한 추궁 전술도 ‘환자 김우중’을 상대로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김 전 회장이 귀국했을 때부터 필연적으로 예견됐던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어차피 김 전 회장의 건강상태가 정상적인 구속수사를 견뎌내지 못할 상황이면 귀국해 사법처리된다 해도 김 전 회장 본인이나 대우사태 관련자들에게 미치는 충격은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선 김 전 회장이 병원 입원에서도 자신의 구명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만들려는 치밀한 계산 아래 움직인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당초 김 전 회장은 자신이 설립자나 마찬가지인 아주대병원에 입원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국 세브란스 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버티다 병원으로 가는 것은 물론 병원 입원도 최대한 특혜를 피하려 한다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처신은 재판이 완료된 이후 김 전 회장이 사회에 복귀할 경우 불리한 여론을 최소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요소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찰과 김 전 회장 사이 ‘싸움’의 저울추가 김 전 회장 쪽으로 기울고 있는 느낌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