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도 함께…거 참 ‘으리’ 있네!
#홍명보 사퇴 전말
월드컵 실패 후 여론은 들끓었다. 홍명보 감독의 ‘의리 축구’가 월드컵을 망쳐놓았다는 비난과 함께 사퇴압박이 거셌다. 그러나 축구협회의 유임 결정은 이미 오래전에 예정돼 있었다고 한다. 여론을 살피는 시늉만 했을 뿐 감독 유임은 기정사실로 해놓고 여론의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홍명보 감독이 지난 10일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후, 허정무 부회장과 인사하고 있는 모습. 허 부회장도 이날 홍 감독과 함께 동반 사퇴했다. 최준필 기자
홍 감독은 6월 27일(한국시간) 상파울루에서 열린 벨기에와 월드컵 조별리그(H조) 최종전(0-1 패)을 마친 뒤 축구협회 황보관 기술위원장을 찾아 사퇴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축구협회는 이를 만류했다. 2차례에 걸친 정몽규 축구협회장의 만류로 마음을 바꿨고, 잔여 임기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홍 감독의 위신은 처음과는 천양지차였다. 월드컵까지만 해도 어떤 시도를 해도, 또 어떠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았던 그이지만 유임이 발표된 직후부터는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할 시어머니가 많아졌다. 그래서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홍 감독이 협회의 유임을 따르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면서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해 ‘소신 없이 자리에만 연연한다’는 비판도 나오면서 그가 과연 정상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상황이 도래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이런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진사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홍 감독은 단단한 원칙과 소신으로 대표됐는데 월드컵을 기점으로 비합리적이고 고집스러운 인물로 낙인찍혔다. 모든 말과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월드컵을 앞두고 경기도 분당 지역 고가의 땅을 매입한 일이 한 인터넷 경제전문 매체 보도로 인해 불거져 구설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각에서는 ‘월드컵 준비를 앞두고 분당에 땅을 보러 다니는 동안에 알제리 감독은 K리그 전력분석을 했다’는 식의 이야기에 홍 감독이 상당히 불편해했다는 전언이다. 여기에다 대표팀이 16강 탈락 뒤 가진 뒤풀이도 논란이 됐다. 최근 공개된 1분 30여초짜리 대표팀의 뒤풀이 동영상을 두고 말들이 많다. 축협에서는 “동영상은 식사 자리 중 극히 일부분이었고, 식사 내내 유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적극 해명했다. 하지만 동영상을 보면 현장이 매우 들뜬 분위기였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일부 선수들은 신나게 춤까지 춘다. 곳곳에서 휘파람 소리와 환호성도 터져 나온다. 이를 두고 일부 네티즌들은 “브라질에 관광하러 갔느냐”며 비난을 퍼붓고 있다.
홍 감독은 이에 대해 “땅 매입 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훈련 중에 나와서 한 일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제가 그렇게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다”며 “월드컵 후 뒤풀이 논란은 패배로 슬퍼하는 어린 선수들을 챙기고 싶었던 내 생각이었다. 리더로서 신중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평소대로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 일이 갑자기 터지며 어렵사리 임기를 보장받았던 홍 감독을 더욱 난처한 처지로 내몰았다. 사퇴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홍 감독의 한 측근은 “가족들의 뒤까지 캐고 다닌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독직을 수행하고 싶겠느냐”고 반문했다.
#축구협회는 어디로?
축구협회도 좌불안석이다. 월드컵 실패에 대한 책임을 누구도 지려 하지 않았다. 홍 감독의 유임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쏟아지는 기자들의 총알(질문) 세례를 온 몸으로 받아낸 이는 허정무 부회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축구회관 브리핑 룸에는 축구협회의 몇몇 인사들도 있었지만 한 명도 앞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홍 감독이 자신사퇴한 데 이어 허 부회장도 동반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홍 감독 사퇴 후 정몽규 회장(오른쪽 세 번째)을 비롯한 축구협회 임원진들이 사죄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최준필 기자
현재 축구협회 내부는 아주 심각하다. 불통과 독선, 오만으로 가득 찼던 전임 집행부 때와 별 차이가 없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수뇌부 회의 자리에서 정몽규 회장에게 직언하고 날카로운 발언을 하는 인사는 거의 없다고 한다. 수뇌부는 현장을 뛰는 일선 팀장들이 내놓는 의견을 묵살하기 바쁘다. 이유와 핑계도 다양하다고 한다. 어떤 제안이 전달되면 현실적인 제약을 들며 해보기 전부터 “어려울 것 같다”는 답이 거의 즉각적으로 돌아온다는 게 축구협회 내부 직원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행정처리도 엉망이다. 최근 불거진 특정 직원 해고는 축구협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차 없고, 대책 없는 인사조치로 비난이 쏟아지지만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채 사태가 그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결국 위기에 내몰린 축구협회 수뇌부에게 ‘홍명보’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정몽규 회장의 꿈은 단순히 한국 축구계 전체를 이끄는 수장이 아니다. 최소 한 번 이상의 임기(4년) 연장을 노리며 FIFA 등 국제 축구계 핵심 인사로 뻗어나가길 바란다는 게 대다수 축구인들의 시선이다. 브라질월드컵에도 축구협회는 수억 원(약 6억 원 추정)을 들여 회장 선거 투표권을 가진 대의원들을 현장으로 초청했을 뿐 그간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한 원로 축구인들을 초청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당연히 자신들이 선택하고 기획한 대로 대표팀이 승승장구해야 좋은 점수를 딸 수 있었지만 홍 감독의 사퇴로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