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에게 아버지 잃은 심정으로 12·12 감행”
▲ 1979년 12월12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관련혐의로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이 발생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일대에 시민들의 통행이 금지되고 있다. 80보도사진연감 | ||
기억의 저편에서 얼핏 떠오르는 몇 개의 텔레비전 장면이 있었다. 17년쯤 전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이 큰 미남 윤태식이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홍콩에서 북괴에 의해 납치되려다가 탈출한 ‘반공투사’였다. 그가 기자들의 질문에 눈물을 흘리며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은 몇 년 전 ‘패스21 게이트’ 사건이라고 해서 사업가로 성공한 윤태식이 정·관계 인물들에게 로비활동을 해서 사회적 폭풍이 몰아치던 사건이었다.
얼마 전 MBC에서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을 방영했다. 그 드라마 속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장세동, 이학봉, 박철언과 수지 김 살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화면에 나타난 수지 김 살해은폐 사건의 이름은 ‘마카로니 공작’이었다. 어느 날 점심 때 만난 한 선배가 불쑥 이런 제의를 했다.
“자네 이학봉씨 사건 한번 안해볼래?”
그 선배는 각계각층에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나는 강한 흥미를 느꼈다. 더구나 난 그에게 25년 전 운동권 핵심이던 친구가 석방될 때 도움을 받은 면이 있었다. 그 빚을 갚을 기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군사반란죄 재판이 끝난 후 어느새 다시 10년이 흘렀다. 한 번은 전화로 두 번째는 방청석의 먼발치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직접 얼굴을 마주할 계기가 된 것이다.
역삼동의 한 조용한 식당에서 이학봉씨를 만났다. 그는 드라마 속에서는 아직도 권총을 차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40대 초의 육군 중령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는 칠십을 바라보는 사람 좋아 보이는 평범한 이웃집 노인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와 깊어가는 주름들, 그리고 약간 느려 보이는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권력도 순간이고 시간이 흐르면 패기만만한 젊은이도 할아버지가 되는 법이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1980년 당시 운동권에 있던 제 친구를 석방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언젠가는 한번 그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24년 전 일을 떠올리며 인사했다.
“글쎄요. 오래된 일이고 당시는 그런 게 너무 많아서 제가 기억을 못하겠는데요.”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본인들 명예가 있어서 밝히기는 그렇습니다만 내 나름대로 몇몇 분들은 돕기도 했다는 생각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나도 보는데 나쁜 일이고 좋은 일이고 모두 다 내가 했다고 나옵디다. 나는 드라마에서처럼 색안경 쓰고 사람들 앞에서 폼 잡은 적 한 번도 없어요.”
“당시 운동권으로 잡혀 들어간 사람들의 최종 분류 권한은 누가 가졌나요? 운동권 핵심이던 제 친구는 A급이었다가 D급으로 변경되어 바로 석방이 됐는데 말입니다.”
“최종적인 판정권한을 가진 사람은 수사국장이던 저였죠.”
그렇다면 24년 전 내가 간접적으로 부탁을 했던 건 그였다.
“그러면 맞네요. 그때 전 육군 중위였고 너무 차이가 나서 만날 엄두는 못 냈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그때 빚을 갚았으면 했습니다. 친구 가족은 집이라도 팔아 돈을 대겠다고 했으니까요.”
종업원이 들어와 음식들을 상 위에 놓고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군사반란죄 재판 때 그걸 다 방청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피고인 각하>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그 첫 장면에서 재판받으시는 모습을 묘사했었는데….”
나는 그가 책을 읽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말했다. 그의 저돌적인 당당함을 염두에 두고 먼저 서술한 것이다.
“엄 변호사가 쓴 책 얘기를 듣고 그 후에 읽어봤어요. 내가 양 허리에 손을 얹고 어쩌고 했다는데 난 전혀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좌우지간 나를 나쁘게 썼구나 생각했죠.”
그걸 쓴 나와 그의 사이에 시각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비굴하지 않은 모습을 저는 작가로서 캐치한 거죠. 목숨을 구걸하려고 비굴하게 처신했던 분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랬어요. 같이 행동하고는 군사반란범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우리를 배신한 동료들이 있었죠. 또 법정에서 열을 올리면서 나를 군사반란의 주동같이 몰아친 장군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그들이 피해자이고 억울한 사람들이라면 전두환 정권 때 주는 혜택도 다 거절했어야 맞지 않습니까? 주는 자리나 돈들은 잘 받아놓고 시국이 바뀌니까 우리들을 죽일 놈이라고 등에서 칼을 막 꽂습디다. 난 그 덕에 세 번이나 감옥에 갔다 왔어요.”
▲ 1979년 11월7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김재규가 총을 들고 범행 당시를 재연하고 있다. 80보도사진연감 | ||
“12·12사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군사반란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시지 않았습니까? 진짜 최고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덤벼든 배경은 뭐였습니까? 반란입니까?”
군사반란죄를 심판한 지난날의 법정은 진실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권력을 가진 몇 명의 잣대와 기획에 의해 재단된 사실이 법정 위에 올려진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또는 어떤 원인 모를 공작에 의한 오판의 여지는 항상 가능했다. 진실은 법정보다는 구치소 작은 방이나 조용한 식당에서 듣는 말에 더 있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보니 이학봉씨 그는 사실을 감추거나 진실을 변조하는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당시 제 나이가 마흔한 살이었어요. 지금 보면 어렸죠. 조금만 더 나이가 먹었어도 아마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과거로 향해 가는 것 같았다.
“저는 육군 사관학교 다닐 때 공산주의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역사에 관한 것이나 <정관정요> 같은 통치학,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책들을 탐독했어요. 1950대 말과 60년대 초에 사관학교에서도 그룹으로 이념서적을 읽는 생도들이 있었죠. 그러다 그 그룹이 걸려서 모두 퇴교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책들을 혼자 읽었던 저는 사관학교당국에 항의했죠. 도서관에 있는 책을 가져다 읽은 게 무슨 잘못이냐구요. 그래서 퇴교를 당하지는 않았죠.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은 전쟁시대의 사람들이라 공부할 시간이 많이 없었던 분들입니다. 그 분들이 책을 좀 더 읽을 시간이 있었더라면 더 좋은 정치를 했을 탁월한 분입니다.”
그가 자연스럽게 마음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생활을 시작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직할 보안사령부 부대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소령 때 저는 중위로 인연을 맺으면서 계속 따라다니는 형태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 장군과 우리들을 끔찍이 사랑해 줬고 우리도 충성을 바쳤죠. 그런데 아버지같이 모시던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 날 김재규의 총에 맞아 돌아가신 겁니다.
제가 합동수사부 수사국장이 되어 그 초동수사를 맡게 됐어요. 수사를 시작하면서 이상한 게 느껴졌어요. 대통령 암살 현장에 있었던 참모총장이 바로 청와대를 포위하라고 명령한 거예요. 또 장관들이 모이고 총리가 왔는데도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 김재규인 걸 말하지 않은 겁니다. 군인의 시각과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소리죠.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은 바로 그 사실을 국방장관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거든요. 저희들은 그걸 알고 분이 치밀어 올랐어요. 그래서 제가 당시 전두환 사령관에게 정승화를 잡아넣어야 한다고 건의했죠. 그런 무모한 건의에도 전두환 사령관이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선뜻 허락을 하는 거예요. 우리야 당시 마흔한 살의 아직 젊은 나이고 다혈질이라 성질을 제어하지 못한다고 해도 전두환 사령관이야 거의 오십이 됐으니까 신중해야 할 입장인데도 승낙을 하는 겁니다.”
군사반란 법정에서 검사는 ‘보신책을 마련해 놓고 덤벼들지 않았느냐’고 물었었다. 전두환은 그 질문에 검사님은 보신책을 강구하고 수사를 하느냐고 되쏘았다. 성격의 일면이 나타났다.
이학봉씨가 당시 일을 계속 얘기했다.
“그래서 일이 시작됐습니다. 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거사 일을 12월12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서울 주변의 병력을 가진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3군 사령관 같은 사람들이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전두환 장군한테 아예 그 사람들도 미리 구속시켜 놓고 일을 벌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전두환 사령관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자기가 그 사령관들 하고 다 친한 사인데 나중에 그 원망을 어떻게 받으려고 하느냐면서 그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거사 일에 헌병감까지 추가해서 그 사람들을 한 음식점으로 유인해서 모여 있게 했죠. 여차하면 제가 수사관들을 보내 그 사람들을 모두 잡아둘 생각을 했었어요.”
나는 그가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 공관을 공격한 배경이 궁금했다.
“12·12사태 때 세부적인 반란계획이나 어떤 정치적 야심을 가진 면도 있었겠네요.”
내가 단정하듯 물었다. 인생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무모했다고 말씀드린 거죠. 당시 저는 어떤 생각이었냐면 안방에서 아버지가 강도를 만났는데 우리 아들들은 사랑방에 있다가 그 사실을 처음 안 거예요. 아들들이 강도가 무서워서 떨어야 하겠어요? 아니면 목숨 걸고 아버지를 죽인 강도와 싸워야 하겠어요? 정승화 참모총장을 연행한 12월12일까지는 정말 그랬고 정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건 광주문제가 불거진 5·17 이후였죠.”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나니까 어땠습니까?”
내가 물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걸 계기로 모든 권력이 무릎을 꿇고 알아서 깁디다. 계급에 상관없이 높은 사람들이나 장관들도 우리들 눈치를 보고 허락을 얻으려고 하더라고요. 사실상 우리들이 허장성세인 면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그러다가 광주사태가 나자 전두환 사령관이 주춤했어요. 너무 벅찼죠. 사령관은 보안사 안가 방에 박혀서 이틀간 두문불출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들 심복들이 찾아가 ‘이제 와서 후퇴할 수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모시고 나온 적이 있어요.
당시 김재규 재판도 제가 지켜봤죠. 제 생각으로 사실 김재규는 민주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붙은 수십 명의 똑똑한 변호사들이 민주인사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어요. 어느 날부터 김재규는 법정에서 자기가 민주투사가 되어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오히려 김재규가 세뇌당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