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들 대결 유도한 박통, 뒷돈 받아서 나눠준 전통
▲ 1963년 8월26일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의 전역식 모습. 김종길 사진집 | ||
한 사람의 소송을 대리하기 위해서는 그의 캐릭터를 가급적이면 완벽하게 파악해야 했다. 그의 생각과 그동안 행동을 해왔던 어떤 의식체계나 행동양식을 파악하면 진실의 열쇠를 얻게 될 가능성이 많았다.
배우 최은희나 신상옥 감독같이 홍콩에서 우리 국민이 북한에 납치될 뻔했던 사건은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관심사건이다. 윤태식이 피랍될 뻔했다는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은 대통령에게 보고 후 사실이 다르게 드러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 문제를 강직하게 정면 돌파한 건지, 아니면 잔꾀를 부려 덮어둔 것인지, 아니면 부하들에게 속거나 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학봉씨 사건을 맡게 된 나는 그의 대충의 이력은 알고 있었다. 1938년 김해 출생인 그는 육군사관학교 18기로 졸업 후 보안사 대공수사과장을 거쳐 1980년 합수부 수사국장을 지냈다. 그후 대통령민정수석과 1986년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을 지냈고 제13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가 요직에 있을 때 일을 처리한 이면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알고 싶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용인술은 어땠습니까?”
내가 물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극도로 반목한 걸로 알려져 있다. 군인들도 전두환 장군과 그의 후배장교들처럼 박정희 대통령을 아버지같이 생각하고 모시는 그룹이 따로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행태들이 자연발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지 알고 싶었다. 이학봉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은 부하들을 분열시키고 자기네끼리 싸움하게 만든 면이 있었어요. 또 적당히 부패하게 만들기도 했고요. 청와대 비서실 안에서 서로 반목·대립하게 만든 근본원인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있었죠. 그래서인지 제가 민정수석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는 다른 ‘반대정책’을 취했죠. 부하들을 전부 화목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돈 문제도 다 자신이 받아 가지고 나누어 줄 테니까 이권에 개입하거나 절대 돈 받지 말라고 주의를 줬어요. 당시 저는 정권의 실세로 알려진 민정수석이니까 돈을 주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디다. 그렇지만 난 돈 받은 적 없어요. 지금까지 세 번 감옥에 갔다 왔는데 만약 돈을 탐했더라면 훨씬 더 많이 감옥에 갔을 겁니다.”
그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가져다주는 뇌물을 받지 않은 이유가 또 있어요. 제가 합수단장을 하면서 정치인의 부정부패를 조사했는데 어떤 사람이든 간에 털면 비위사실이 주르르 나오더라구요. 안 나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오직 명예를 가진 몇몇 분들은 털어도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감동했죠. 그리고 나도 돈보다 명예를 가지려고 마음먹었어요. 한편으로 착각한 건 권력을 항상 잡고 있을 거로 안 거죠. 승승장구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권력만 가지고 있으면 돈은 언제든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걸로 생각했어요. 이제 나이 먹고 모든 걸 잃고 보니 그것도 철없는 생각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요. 남들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면 엄청난 재산을 숨겨놓았겠구나 하고 의혹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우리 아들놈이 서른다섯 살인데 도와줄 돈이 없어요. 권력을 가졌을 때 너무 젊어서 돈에 대한 관념이 없었던 겁니다.”
권력과 돈에 대한 그의 사고의 일단이 들여다보였다.
“참,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했는데 소위 말하는 신군부에서는 정말 죽일 의도였습니까?”
드라마나 재판결과를 보면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수사한 책임자로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전두환 사령관이나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김대중씨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제가 육군교도소를 찾아가 미국에 가시라고 권했죠. 그래서 미국에 가신 거구요.”
“그러면 당시 왜 정치인 김대중을 구속하고 재판한 겁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김대중씨 측근에서 별일이 다 일어났어요. 정작 김대중씨 자신은 모르고 있을지 몰라도 그 아랫사람들은 벌써 자기네들 세상이 온 줄 알고 심지어 행정부 국장까지 나누어 먹는 계획들을 짜고 있더라니까요. 그래서 구속한 면도 있습니다.”
“당시 발생한 광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내가 합동수사단장이 되어 광주에 내려가서 보니까 실제로 민주인사라고 할 사람들은 10%도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폭동세력이었어요. 그리고 군부대와의 충돌도 사실은 우발적이었던 거구요. 저는 그때 구속기소할 사람을 최소한으로 잡았어요. 그 사람들이 분명히 나중에 정치적 부담이 될 것으로 봤거든요. 당시 총 조사를 한 인원이 3천 명인데 실제로 구속 기소된 인원은 1백 명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다 풀어주라고 했어요. 지금 광주민주화운동본부를 보세요. 구속자 모임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잖아요? 그때 더 많이 구속시켰으면 그 세력이 지금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나중에 반정부세력을 확대하는 꼴이 되는데 내가 왜 그렇게 하겠어요?”
▲ 지난 80년 8월22일 군을 전역하고 사열받는 전두환 전 대통령. 81년 보도사진연감 | ||
“전두환 대통령이 국보위 위원장 시절 당시 저는 공무원 숙정도 최소한인 50명 정도만 하자고 그랬어요. 그 정도면 공무원사회가 충분히 얼어붙을 거 같았죠. 그리고 그 이후는 각부 장관에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전두환 위원장은 국보위 담당부서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공무원 숙정을 광범위하게 했죠. 결국 나중에 그 원한과 책임이 모두 전두환 대통령에게 간 거 아닙니까? 언론정화 문제도 그렇습니다. 전 대통령이 혼자 다 안아버리는 바람에 그 보복을 나중에 철저히 받은 거구요.”
그는 민정수석을 할 당시도 온건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죽은 건 핵개발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고 미국이 관련되어 있는 듯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는데요….”
내가 물었다.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미국에 가서 대통령이 된 레이건을 만났어요. 그 자리에서 레이건이 딱 세 가지를 요구했어요. 첫째로 핵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레이건의 두 번째 요구는 장기집권하지 말라는 거고, 세 번째는 인권이었어요. 그 세 가지만 지키면 뭐든지 도와주겠다는 거였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우선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핵이 뭐 중요하냐고 그랬죠. 가까운 일본도 핵우산 아래서 자주국방보다는 경제발전이 먼저라는 거죠. 장기집권 문제는 단임으로 끝낸다고 이미 천명했고 김대중은 처음부터 죽일 의사가 없었으니까 레이건의 세 가지 요구는 다 들어준 셈이죠.
난 지금 반대세력이 뭐라고 해도 당당해요. 정승화 참모총장을 잡으러 간 것에 대해서도 추호의 죄책감이 없어요. 빨갱이들은 날보고 뭐라고 하지만 아무 거리낌이 없어요. 내 소신대로 산 거죠. 지금 노무현 정부를 보면 뒤에서 실세들이 조정을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주의해서 지켜봐야 할 건 대통령의 뒤에서 언론에 집중적으로 얻어터지는데도 끄떡없는 인물들입니다. 그 인물들이 이 정권의 조정자들일 겁니다. 내가 해 봐서 알아요.”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색깔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사건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참, 지금 소송 걸린 건 1987년에 안기부 2차장으로 있었기 때문인데 그 무렵의 상황을 말해 주시죠.”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다가 학원안정법 문제가 대두됐어요. 제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강하게 반대하는 말씀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전 대통령이 나보고 당분간 안기부 차장으로 가 있으면서 좀 쉬라고 하시더라고요. 가서도 국내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해외담당차장을 시키더라구요. 바른말 하다가 귀양을 간 셈이죠. 일과 후면 테니스 치면서 소일했죠. 안기부장인 장세동 선배가 워낙 꼼꼼하고 직접 챙기는 사람이라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었죠.”
“안전기획부의 ‘수지 김 살해 은폐조작사건’이 차장을 하실 당시에 발생한 사건인데 어떻습니까?”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분량을 최대로 얻어들어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북괴에 의해 납치될 뻔한 한국인이 있다는 간단한 보고를 받았어요. 기자회견 얘기가 나왔죠. 그러다가 퇴근 무렵이 되니까 북괴에 의한 납치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기자회견은 안하는 게 좋겠다는 현지 파견관의 전문이 날아왔다는 겁니다. 담당 실무 국장이 안하는 걸로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출근해 보니까 다시 기자회견을 하는 것으로 방침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가 군더더기를 빼고 담백하게 말했다.
“기자회견 후 윤태식이 단순 살인범으로 밝혀져 그 사실을 은폐했던 게 지금 15년 만에 들통이 나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내가 물었다.
“글쎄, 나도 정말 이상합니다. 장세동 선배나 저나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 아닙니까? 설사 잘못 보고했다면 다시 가서 정정하면 됩니다. 대통령한테 안면 한 번 구기는 셈인데 그게 뭐 대단하게 겁이 날 일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그런 은폐조작사건이 발생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일단 윤태식이 반공투사인 걸로 기자회견 방송이 연일 대대적으로 터지니까 단순살인범인 걸 발표하면 망신이라 그랬던 건 아닙니까?”
내가 물었다.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죠. 당시만 해도 언론과의 협조가 가능한 때였어요. 잘못됐다고 언론사에 뒤로 얘기하고 몇 달만 보도를 참아달라고 하면 그게 가능한 시절이었어요. 윤태식이 살인범이라면 바로 검찰에 넘겼어야죠. 어쨌거나 안기부에서 그 사건을 수사기관에 통보하지 않고 뭉개고 있었다면 그건 잘못한 거죠. 그리고 잘못한 거면 대통령한테 혼 한번 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대충 사건의 커다란 윤곽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