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송금사건에 대한 특검법안 을 거부할 것인가. 사진은 지난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 때의 노 대통령(왼쪽)과 김대중 전 대통 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대북 송금 특검법안은 한나라당이 지난달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자민련과 공조를 통해 표결처리해 현재 법안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얼핏 보기에 여야가 정면대립하는 다른 정치현안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문제가 왜 개헌과 정계개편의 모티브가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특검 법안을 둘러싼 여권내 각 세력의 이견,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밀접한 관계인 민주당 동교동계 등 구주류와 노 대통령을 축으로 급격히 행동반경을 넓혀가고 있는 신주류 간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근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
특히 이른바 ‘살생부’ 파문과 민주당 개혁방향을 놓고 이미 갈등의 골이 깊어진 양 세력이 특검법안에 대해 여권 핵심부가 어떻게 최종 입장을 정리하느냐에 따라 ‘결별’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는 전망도 더해진다.
또 이에 따른 결과는 민주당 구주류 중심의 ‘호남권 중심 신당’으로 구체화되고 이 신당은 2004년 4월 17대 총선 결과에 따라 향방이 가려질 개헌 국면에서 한나라당과 연대해 내각제 개헌을 본격 추진하게 될 것이란 시나리오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 동교동계와 지난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협의회 멤버로 활동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최근 신당 논의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동교동계는 노 대통령의 특검법안 거부권 행사 여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헌법에 따라 3월14일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구주류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노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의 만찬회동에서 거부권 행사를 거듭 강조하는 등 청와대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구주류측은 대외적으로 특검법안이 ‘절차상 하자’가 있으며 특히 민주당이 의원총회를 통해 당론으로 ‘특검 반대’ 입장을 확정한 만큼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당연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노 대통령과 신주류가 특검법안 수용을 결정할 경우 한화갑 전 대표의 사퇴(2월23일) 이후 수세국면이 계속되고 있는 자신들의 여권 내 처지가 결정적으로 악화될 것이란 위기감이 존재한다.
구주류의 한 의원은 “신주류의 궁극적 목표는 ‘개혁’을 내세워 지난해 대선에서 노 후보와 대척점에 섰거나 지지하지 않았던 구주류들을 내년 총선 이전 공천과정에서 ‘안락사’시켜 민주당을 명실상부한 ‘노무현당’으로 신장개업하려는 것”이라며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의원들 사이에서는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찍 소리 한번 못하고 밀려날 지경이니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내년 총선 이후 개헌 국면 도래 등 향후 정국 변화에 대비한 조직적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구주류의 이 같은 움직임은 대선 국면에서 반노(反盧)-비노(非盧) 진영의 양축이었던 박상천 최고위원과 정균환 원내총무의 행보에서 이미 구체화되고 있는 상황.
당 개혁안을 둘러싼 공방에서 구주류의 입장을 이론적으로 대변해 온 박 최고위원은 지난 7일 광주·전남경영자협회 초청 특강을 통해 “경제도약과 국민통합 실현을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1인 독점시대를 끝내고 여러 정치세력이 공존할 수 있는 국민통합형 권력구조로 만들어야 한다”며 이른바 ‘분권형 개헌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 그는 특히 ‘분권형 개헌’이 이뤄지면 “내정 분야는 2개 이상의 정당이 연립, 공동집권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상생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해 최근 물밑에서 확산되고 있는 ‘동교동 신당’ 등 구주류 중심의 독자 세력화 움직임과 관련해 주목을 끌었다.
한 전 대표와 함께 퇴진 압력을 받았던 정 총무는 특검법안과 관련한 구주류의 입장을 강경하게 표출하고 있다. 정 총무는 9일 노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의 청와대 만찬에서 “특검법은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국익을 고려하지 않은 법이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인정할 수 없고 국회의 오랜 관행과 합의를 무시해 절차적으로도 하자가 있다”면서 “특검은 미국에서조차 무용론이 대두되고 있을 만큼 부작용이 많고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노 대통령을 면전에 놓고 압박했다.
두 사람의 이 같은 발언은 구주류가 향후 정국에서 자신들의 진로와 관련해 특검법안 처리와 개헌론을 주요 고리로 삼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분석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DJ를 보호해야 한다’는 동교계 등 구주류의 정서를 바탕으로 특검법안 처리과정에서 DJ에 대한 직접조사, 나아가 DJ 사법처리 가능성까지 열어 놓고 있는 야당의 특검법안을 막겠다는 의도로 분석된다.
또 개헌론은 신주류측이 특검법안을 수용하며 DJ와 선을 긋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에 대한 퇴출 압박을 강화할 경우 신당 창당을 통해 총선 후 개헌국면에서 한나라당 내각제 개헌론자들과 연대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나라당 내 내각제론자들이 노 대통령의 특검법안 수용을 전제로 ‘노 대통령과 DJ 결별→구주류의 이탈과 신당 창당→17대 총선 후 한나라당, 자민련과의 내각제 공동추진’ 시나리오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
한 핵심 당직자는 “민주당 구주류는 이미 내년 총선 때까지 신주류와 함께 갈 수 없으며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신당 창당이 불가피하다는 잠정결론을 내린 것으로 안다”며 “특히 동교동계는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이상의 의석만 얻으면 DJ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음은 물론 선거 후 개헌 국면에서 한나라당-자민련과 내각제 개헌을 추진해 권력을 분점할 수 있다는 계산을 이미 끝냈다는 얘기가 민주당 인사들의 입에서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계 출신으로 동교동계 사정에 정통한 한 재선의원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구주류와 한나라당 내 강경개혁파들의 이탈이 맞물리면서 최소한 2개 이상의 신당이 창당돼 다당제 구도로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며 “만약 선거 결과 다당제 구도가 형성된다면 이는 곧 내각제 개헌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고 이 경우 동력은 한나라당과 자민련, 그리고 민주당 구주류가 중심이 된 신당 간의 연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민주당 신주류도 이 같은 전망과 관련, 정치지형의 변화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구주류가 ‘DJ 보호’를 내세워 호남권을 토대로 한 신당을 창당할 경우 또 다른 ‘지역정당’이란 비판을 면키 어렵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입장이다.
다만 구주류의 이탈이 가시화되고 DJ가 이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 경우 텃밭인 호남 민심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한 전 대표를 상임고문으로 임명하는 등 ‘구주류 껴안기’에 고심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구주류의 이탈이 당 개혁과 이에 따른 내년 공천과정에서의 ‘물갈이’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고려해 김원기 고문 등이 나서 개혁안의 수위를 조절하는 데도 신경을 쓰고 있다.
신주류측 한 인사는 “구주류 일각에서 기대하는 ‘DJ 후원하의 호남 신당’시나리오는 노 대통령과 DJ의 관계, 호남 민심 등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없다”며 “특히 특검법안에 대한 노 대통령의 결정을 빌미삼아 신당을 만들어 개헌 국면에서 역할을 찾겠다는 구상은 지난 99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일부 민주계가 추진했다 실패한 ‘민주산악회 재건운동’의 전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영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