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가 끌고 차기가 밀고… “그는 ‘거대한 권력자’였다”
▲ 2004년 6월 훈장을 받는 황우석 교수. 청와대사진기자단 | ||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파문으로 국민들의 실망감과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정계와 과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주장이다. 학계의 한 인사는 “실제 참여정부 출범 당시 황 교수가 거의 과기부 장관으로 확정적이라는 보도를 접하고 솔직히 좀 충격을 받았다. 어느새 황 교수가 이처럼 커버렸나 싶었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동안 황 교수를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은 그를 ‘과학자’로 보다는 ‘정치지망생’ 쯤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는 것이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다. 최근 밝혀지고 있는 그의 ‘인맥 행보’와 ‘정치 발언’은 이런 학계 주변의 시각이 단순히 질시의 차원만은 아니었음을 충분히 반영해 주고 있다.
실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황 교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의학자였던 황 교수가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DJ 정권의 핵심부에 접근했을까.
87년 10월 서울대 수의학과 조교수로 발탁된 황 교수는 이때만 해도 자신의 전공에 충실한 채 송아지에만 매달렸다. 93년 11월 국내 첫 시험관 송아지를 탄생시켰고, 95년 2월에는 핵이식 기법에 의한 복제송아지를 탄생시켰다. 수의학계에서는 괄목할 만한 일이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명예욕이 강했던 황 교수로서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주변의 이야기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질 법한 호기심이 ‘인간복제’ 가능성에 대한 연구라고 한다. 이미 소나 양 등 동물의 난자 핵 이식을 통한 복제에 성공한 과학계에서는 점점 인간복제로 그 영역을 위험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엄격히 규제되고 있었다. 황 교수가 국회를 활발하게 오가며 인맥의 폭을 넓히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DJ정권에서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한 김영환 전 의원은 자신이 국회 과기위 위원이던 98년을 전후로 황 교수를 자주 만났다고 한다. 그는 “당시 생명공학 윤리 문제가 첨예화된 상태에서 황 교수가 부쩍 자주 국회를 드나들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과학자로서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접촉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할 순 없었다”고 밝혔다.
아무튼 체세포 복제에 대한 연구의 꿈을 키웠던 황 교수는 당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과기위 의원을 중심으로 인맥을 넓혀 나갔다. 그 매개체는 자신의 출신교인 대전고 서울대 학연과 고향인 충남 대전의 지연이었다. 그를 통해 과기위 소속이거나 국회 과학포럼 소속의 김덕룡 강창희 이해찬 정동영 김영환 등 여야 의원을 두루 사귀었다.
황 교수의 인생을 크게 바꾼 결정적 계기는 97년 DJ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이를 통해 서울대 72학번 동기 이해찬 총리와 대전고 동문 강창희 전 장관은 DJ정권 초대 교육부 장관과 과기부 장관에 각각 임명됐다. 황 교수로서는 다시없는 천군만마였다.
황 교수의 기대는 현실로 곧바로 드러났다. 이 당시 교육부장관은 ‘한국두뇌(BK) 21’ 사업으로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했다. 강 전 장관은 과학계의 오랜 숙원으로 알려진 대통령 직속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했다.
99년 4월1일 김 전 대통령이 위원장으로 직접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회의를 주재했는데, 이 자리에 바로 황 교수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황 교수가 체세포 복제를 통해 탄생시켰다는 한우 ‘진이’의 쾌거를 극찬했다. 이 자리에는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도 위원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황 교수가 한창 각광받을 당시 “오늘의 황 교수를 만든 일등공신은 당시 ‘BK 21’을 추진했던 이 총리의 공”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강 전 장관은 비록 국가과기위 첫 회의 직전인 3월 당에 복귀하기 위해 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전단계의 작업은 사실상 그가 모두 주도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이 첫 회의에 황 교수가 참여했고 그의 연구 성과가 주요 화제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상 이 총리와 강 전 장관이 김 전 대통령에게 황 교수의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시킨 것이다. 황 교수 또한 특유의 장밋빛 청사진 화법을 늘어놓았다. 고육질의 우량 토종 한우의 대량 복제를 역설했다.
실제로 2001년 4월 김 전 대통령과 김영환 과기부 장관은 복제 한우와 복제 젖소 각각 10마리씩을 북한에 보낼 계획도 마련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DJ정권에서의 황 교수 띄우기에 있어 또 한명의 공신은 정동영 전 장관이다. 그는 96년 15대 국회 당선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과기위에서 황 교수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72학번 동기라는 공감대까지 형성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후 황 교수는 DJ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2000년 4월 김 대통령으로부터 홍조근정훈장을 받았고, 2001년 6월에는 김 대통령으로부터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임명장을 수여받았다. 이 때 진대제 당시 삼성전자 사장도 함께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9월에는 ‘과학기술인상’을 수상했다.
황 교수의 ‘인맥 넓히기’는 정계에만 그치지 않았다. DJ정권 당시 과기부 관료로 상당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던 최석식 현 과기부 차관과도 친분을 다졌다. 최 차관은 당시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을 역임하며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시민단체에서는 당시 경실련 과학기술위원장이었던 박기영 순천대 교수가 있었다. 전남 순천 출신의 박 교수는 당시 젊은 과학도들에게 신망도 두터웠고, DJ정권과도 관계가 원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황 교수의 ‘친근 화법’은 자신에게 비협조적일 수도 있는 시민단체 지도자까지 자신의 최측근으로 돌려 놓았다.
DJ정권 시절 자신의 든든한 후원군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 출범으로 그 절정의 꽃을 피웠다. 이 총리와 정 전 장관은 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황 교수의 주가도 동반 상승했다. 황 교수에 대해 잘 몰랐던 노무현 대통령이 출범 단계에서 황 교수를 일약 과기부 장관으로까지 염두에 뒀던 것도 이들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진대제 장관은 정통부 장관에 임명됐다.
무엇보다 최석식 비서관과 박 교수는 과기부 차관과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사람은 황 교수가 박수를 받는 자리에 항상 함께 해서 그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의사를 밝혔다. 이들은 최고과학자 선정위원회의 정부 대표로 참여해서 사실상 황 교수의 최고과학자 선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대제 장관은 황 교수 기념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정 장관은 2004년 총선 때 황 교수를 비례대표 후보로 영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때 여권에서는 “오명 과기부 장관 후임으로 황 교수의 입각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떠돌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자꾸 떨어지는 당 지지율 회복을 위해 깜짝 인사 영입이 있을 수 있다. 강금실 전 장관 말고도 황 교수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강창희 전 장관도 야당 편에서 황 교수에 대한 비례대표 영입 작전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황 교수는 당시 국회의원에 나설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황 교수의 의원 정치 후원금 파문과 관련, 얼마전 한 국회의원 보좌관이 인터뷰에서 “황 교수가 국회 내에 자신의 정치 인맥을 만들려 했던 것 같다”는 말은 그냥 흘려버릴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 전 대통령은 황우석 파문이 한창 논란이 되던 지난해 12월에도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모두 큰 걱정을 하지만 나는 황 교수를 믿는다. 세계가 모두 이해할 수 있게 해명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성공을 이뤄낼 것”이라고 변함없는 믿음을 밝히기도 했다.
황 교수의 정치적 인맥이 얼마나 깊고 끈끈한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모습인지도 모른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