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뒤바뀐 명령 “납북 기자회견 강행하라”
▲ 1987년 1월8일자 중앙일보 1면에 실린 윤태식 기사. 당초 기자회견을 보류하라던 안기부 방침은 급히 ‘강행’으로 바뀌었다. | ||
1987년 1월 5일 싱가포르
안전기획부 요원 K는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파견되어 있었다. 동남아지역의 북괴 활동을 체크하는 임무였다. 마약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미사일이 해협을 통해 아랍 쪽으로 가기도 했다. 더러 사고를 낸 국내 원양어선의 어부들이 월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땅거미가 질 무렵 사무실로 돌아왔다. 모두 퇴근한 대사관은 적막했다. 그는 건물 구석의 밀실로 들어갔다. 그때그때 수집한 첩보를 암호전문으로 본부에 타전해야 했다. 그 실적에 그의 진급이나 보직이 달려 있었다. 김일성 일가에 관련된 정보나 아니면 거물급의 납북사건 같은 것들도 좋은 첩보였다.
신문의 1면을 장식할 수 있고 국민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정보는 그만큼 국내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최근에는 그런 정보가 별로 없었다. 조금 더 개인적인 첩보망을 넓히고 적진 깊숙이 뻗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팀장 격인 상급요원이었다.
“미대사관에서 북측의 위협을 받고 피신한 한국인을 보호하고 있으니 인수해 가라고 해서 조 참사관과 같이 데리고 왔어.”
조 참사관은 외무부 소속이었다. 미대사관측은 그동안 한국인을 차이나타운 내의 모텔에 데리고 있었다. 위험한 인물은 외교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대사관에 함부로 들이지 않았다. 상급요원은 그 한국인을 대사관 근처의 호텔방에 데려다 놓았다. 이제 그는 상급요원과 공동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본부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호텔에 가서 문제의 한국인을 만났다. 이름은 윤태식. 홍콩 주재 상사원이라고 했다. 이십대 말쯤 되는 미남이었다. 눈동자가 안정되지 못한 모습이었다. 불안해하고 있었다.
“제 집사람인 수지하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는데 조총련계 일본인들이 빚 받으러 왔다가 납치해 갔어요. 수지를 찾으러 공항에 갔더니 어떤 여자가 내 이름이 써 있는 종이를 들고 기다리더라구요. 그 여자를 따라갔더니 북한대사관이었어요.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는 남자가 나보고 월북하라면서 기자회견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거기를 탈출해서 미대사관으로 갔어요.”
“북한대사관에서 누구를 만났어요?”
K요원이 물었다.
“광대뼈가 나오고 눈이 날카로운 오십대 초의 남자를 만났습니다.”
K요원은 얼른 북한대사관의 일등서기관 박창용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인민무력부나 보위부 소속이 아니었다. 그가 아니라면 조총련을 낀 다른 조직의 공작일 수도 있었다. 일단 그런 첩보는 신속성이 생명이었다. 어느새 1월 6일 새벽이었다. 한국의 본부는 아직 간부들이 출근하기 전일 것 같았다.
그는 본부 당직실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근무자가 받았다.
“여기는 싱가포르 담당요원입니다. 중요 첩보를 보낼 테니 받는 즉시 배포해 주세요.”
특별한 전문임을 알리기 위해 전화로 다짐했다. 더러 실무자의 책상 위에서 지체되는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문을 받은 본부의 반응은 기민했다. 지시전문이 떨어졌다.
‘한국 상사원이 북괴에 의해 납치될 뻔했다는 내용으로 현지 기자회견을 한 후에 입국시킬 것.’
K요원은 얼핏 <중앙일보> 싱가포르 특파원 남 기자를 떠올렸다.
1월 6일 오전 안기부 해외공작국
장기만 부국장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 정규요원 1기로 들어왔다. 해외파트에서 주로 일을 하면서 휴스턴 총영사, 미얀마 한국대사관 공사를 거쳐 지금은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침 6시경 출근한 그는 새벽에 싱가포르에서 타전된 전문을 읽었다. 부장에게 보고거리가 될 괜찮은 정보였다.
실무부서에서는 항상 대통령이나 부장에게 올릴 만한 신선한 정보를 생산해야 했다. 북괴조직의 한국인 납치시도라면 이미 국장이 부장에게 구두보고를 마쳤을 것 같았다. 그때 국장이 그를 호출하는 인터폰이 울렸다.
외교관 출신인 국장은 정보기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아니었다. 국장은 싱가포르 현지에 출장 가서 기자회견을 감독하고 윤태식을 직접 데리고 귀국하라고 했다. 조금 이상했다. 관례적으로 이런 일은 현지 거점장들이 처리했다. 본부의 간부가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국장이 정보부 출신이 아니라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윗선에서 모종의 특명을 받았든지. 정보기관에서는 상하관계에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시도 구두 명령 하나면 족했다. 그게 불문율이었다.
국장 역시 바빴다. 그 무렵 북한을 탈출한 김만철 일가 때문에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었다. 체제 우위 선전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지시를 받은 그는 바로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부국장은 윤태식의 자술서를 파우치로 본부에 보냈다. 본부에서 다시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그 사이 K요원은 자신의 싱가포르 첩보망을 통해 윤태식의 동향을 체크했다. 정반대의 첩보가 들어왔다. 북한대사관에서 윤태식을 납치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윤태식이 망명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북한대사관 내부의 동향도 파악했다. 윤태식이 거기서 탈출한 징후는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윤태식을 정확히 수사할 필요가 있었다. 싱가포르 현지에서는 곤란했다. 요원들에겐 수사권이 없었다. 자칫 윤태식이 사라지면 큰일이었다. 일단 기자회견은 보류해야 한다고 결론 지었다. 현지에서 즉시 전문을 본부로 타전했다. 잠시 후 본부에서는 그렇다면 기자회견을 보류하라고 지시전문이 내려왔다. 이제 일단락이 져진 것이다.
갑자기 뒤바뀐 지시전문
1월 8일 새벽 0시 50분. 본부에서 비상지시전문이 싱가포르의 안기부 요원들에게 떨어졌다.
‘국가 정책적 판단에 의거한 부장 특명임. 기자회견을 강행할 것.’
명령은 짧았다. 현지 요원들은 공작적 측면에서 기획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과 북은 더러 사실을 왜곡해서 상대방에게 덮어씌우기도 했다.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하부 조직은 본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했다.
외무부 본부로부터도 현지 대사관에 전문이 떨어졌다. 역시 기자회견을 강행하라는 내용이었다. 대사는 펄쩍 뛰었다. 대사 역시 윤태식을 직접 면담하고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의문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기부와 외무부 본부의 일치된 명령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사이 싱가포르 정보기관에서 낌새를 채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은 다른 제3국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암호전문을 도청했는지도 몰랐다. 그날 오후 특파원인 남 기자가 찾아왔다. K요원이 남 기자에게 윤태식을 인터뷰하게 했다. 한참동안 윤태식과 얘기를 하고 난 남 기자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뭔가 이상해. 아니야. 기사는 쓰지 않으렵니다.”
장 부국장은 윤태식을 데리고 방콕으로 옮겨 현지 거점 요원이 데리고 온 <연합뉴스> 특파원에게 윤태식을 인터뷰시켰다.
1월 8일자 <중앙일보> 1면에 ‘북괴, 한국 상사원 납치기도’란 제목으로 방콕발 기사가 발표됐다. 내용은 이랬다.
“북한이 최근 미인계를 이용, 한국인을 평양으로 납치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5일 싱가포르에서 북한대사관 직원에 의해 평양으로 갈 것을 강요받고 붙잡혀 있던 한국 상사직원이 감시원의 눈을 피해 탈출함으로써 밝혀졌다.
현재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서진통상 해외사업부장 윤태식씨(28세)에 따르면 홍콩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는 북괴공작원 일명 수지 김에게 속아 위장결혼한 후 김에게 유인, 납치돼 5일 싱가포르 북한대사관까지 가서 북괴 대리대사와 면담하고 평양으로 갈 것을 강요받았다.
윤씨에 따르면 북괴 대리대사는 자신에게 동구의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하며 유고를 거쳐 스위스에 가서 기자회견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고 불응하면 서울의 가족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윤씨는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수지 김과 결혼했는데 김은 10년간 홍콩에서 호스티스로 생활해 왔으며 지난해 10월 조총련에 포섭돼 윤씨를 유인한 것으로 보인다.”
1면에 기사가 실리고 구체적인 내용들이 4면에 다시 상세하게 설명돼 있었다. 1월 9일 밤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윤태식은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납치를 피해 극적으로 탈출한 반공투사였다. 기자들에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위기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의 용기 있는 탈출이 부각됐다.
그 무렵 수지 김의 아파트 옆집에 사는 캄콴은 더 이상 악취를 견딜 수 없었다. 너무 심한 냄새가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그의 신고를 받고 온 홍콩경찰이 수지 김이 살던 아파트 문을 뜯고 들어갔다. 잠시 후 경찰은 침대 밑에서 부패되어가는 김옥분의 시신을 찾아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