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노인폄하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선거대책위원장직과 비례대표 사퇴를 밝힌 후 곧바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총선 이후 정국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 이상을 차지해 압도적 승리를 하는 경우 재신임의 굴레에서 벗어난 노무현 대통령은 강온 양면책을 구사할 가능성이 크다.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 드라이브를 확실하게 걸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정치론을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이 적어도 1백30석 이상을 차지해 원내 1당으로서 안정의석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열린우리당의 ‘절반의 승리’로 평가되는데 탄핵 역풍의 유리한 국면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지도부 책임론이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나머지는 한나라당이 근소한 차이로 원내 1당을 차지할 경우다. 이때는 한나라당이 선거 결과를 대통령의 재신임 실패로 몰고 가 정국불안이 심화될 전망이다.
[1] 열린우리당 과반 의석 차지
4월15일 오후 6시. 투표가 종료됨과 동시에 각 방송사들은 자체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열린우리당이 1백50석 이상 과반수 의석을 차지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뉴스가 현실로 나타날 경우 헌정 사상 최초로 개혁적 진보세력이 의회권력마저 교체하는, 한국 사회 대변혁의 첫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탄력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이 강온 양면책을 구사할 가능성이 크다.
먼저 강경책을 보자. 행정부와 국회를 장악한 참여정부가 그동안 거야 세력에 발목을 잡혀 시행하지 못한 각종 개혁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이 경우 두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강경책에 더욱 힘이 쏠릴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 연계 약속은 열린우리당의 압도적 승리로 자연스럽게 해결될 전망이다. 또한 헌법재판소가 총선 민의를 존중해 탄핵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릴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헌재가 그동안 정치적인 점도 고려해 판결을 해온 것을 감안하면 대통령 탄핵안도 기각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이 두 가지가 노 대통령이 지난 4월11일 북악산 산행에서 밝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심경과 일치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봄을 맞으려면 심판을 두 개 더 거쳐야 한다”고 수행기자들에게 언급했는데 앞서의 두 가지 산을 넘어야 한다는 뜻이다.
총선 승리 상황에서 이 두 가지 조건까지 충족되면 노 대통령의 개혁 발걸음은 한층 가볍게 될 전망이다. 특히 열린우리당이 개혁적인 새 인물들을 대거 총선에 투입했기 때문에 국정 전반에 진보적인 정책들이 쏟아져나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경우 한나라당과의 ‘대결’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정책대결이 자칫 또 다른 정쟁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 정치권 일각에서도 노 대통령이 이 점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해 강경책을 쉽게 펴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이에 대해 “집권 후반기로 접어드는 노 대통령이 각종 국정 현안을 제쳐두고 또 다시 정치권을 대결 구도로 가져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탄핵으로 상처받았기는 했지만 17대 국회에서도 야당을 몰아붙인다면 국민들이 큰 ‘개혁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노 대통령이 개혁 칼자루를 함부로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지난 4월11일 노 대통령도 이와 관련해 “(앞으로는) 협력과 상생 대화의 정치로 갈 것이다”라고 밝혀 이 같은 예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동안 갈고 닦은 개혁 칼날을 쉽게 놓기도 어려운 처지라 결국 노 대통령은 강온 양면책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정국을 이끌어갈 것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으로서는 총선 기간 동안 드러난 대로 정체성 확립을 둘러싼 극심한 내홍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서는 ‘신기남 의원 등의 개혁그룹이 비밀리에 여의도에 연구소를 내고 당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기본 로드맵을 작성중’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것은 총선 이후의 사회전반에 불고 있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전제로 하여 작성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작업에는 17대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들을 ‘수구 부패세력’과 ‘희망의 미래세력’으로 분류하여 수구세력을 배제하는 형식으로 철저히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공산이 크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압도적 승리를 할 경우 당내에 거대한 폭풍이 몰려올 수도 있다고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통령이 일하기는 쉬워지지만 예전처럼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상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된다. 강원택 교수는 “앞으로 대통령 선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18대 총선이 있기 때문에 현 17대 의원들이 노 대통령에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대통령 말 한마디에 의원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차기주자들이 정부의 정책에 협조는 하겠지만 대권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자기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 부분 청와대의 정책에 대해 딴 목소리를 낼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한나라당에서는 총선 패배에 따른 책임론이 불가피하게 떠오를 전망이다. 열린우리당의 과반수 확보는 한나라당의 영남권 패배와도 ‘동의어’이기 때문에 ‘텃밭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론이 터지면서 박근혜 대표 체제에도 심각한 내상이 생길 전망이다. 이는 곧 조기 전당대회로 귀결될 것이고 차기 대권주자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상황에서 집단 지도 체제 내지는 관리형 대표체제가 유력하게 검토될 것이다.
[2] 열린우리당 과반 미달 제1당
다음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고 근소한 차이의 원내 1당으로 만족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열린우리당으로서는 탄핵 역풍을 타고 한때 지지율이 50%선까지 육박했던 것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이지만 그래도 헌정 사상 처음 개혁세력이 원내 1당을 차지해 정국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당의 도약에 따른 논공행상도 예상된다. 참여정부 2기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현역 의원들이 내각으로 입각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당내 상황으로 인해 논공행상보다는 책임론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릴 전망이다. 먼저 정동영 의장이 선거 사흘을 남겨두고 선대위원장직을 전격 사퇴한 가운데 선거 결과를 두고 현 지도부와 당내 여러 세력 간에 갈등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으로서는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지역주의 극복과 전국 정당화의 실패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 의장이 총선 결과에 따라 의장직을 내놓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당권을 놓고 또 한차례 갈등을 보일 전망이다. 영남권 개혁세력을 중심으로 당의장 재경선을 통한 ‘김혁규 의장론’이나 ‘집단지도체제’ 등이 나올 수도 있다. 정 의장은 말 실수 때문에 공들여 쌓은 탑을 스스로 허물 위기에 빠져버렸다.
또한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내의 개혁적 인사들에 대한 영입 시도를 할 가능성도 있다. 참여정부 초기 야당 인사들을 내각에 적극 영입하려다가 한나라당의 적대적 태도에 포기했지만 다시 이를 시도할 경우 정계개편도 조심스럽게 전망할 수 있다.
[3] 한나라당 제1당 재등극
한나라당이 또 다시 제1당이 된다면 위의 두 가지 경우와는 판이한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이 경우 노 대통령이 말한 ‘두 개의 산’을 모두 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 먼저 노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문제를 놓고 여야간 격렬한 공방이 벌어질 것이다. 아직 노 대통령이 재신임과 관련한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가이드라인’은 없지만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야권의 승리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지금까지 헌재가 국가적인 이슈에 대해서 정치적 판결을 해온 것을 감안하면 총선 결과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법리적 성격을 중심으로 신속히 진행될 것 같던 당초 기대와 달리 헌법재판소가 탄핵심리 3차 변론에서 소추위원측의 증거조사 신청을 일부 수용해 노 대통령측을 긴장시키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열린우리당 내부적으로는 지역주의 청산과 전국 정당화를 위한 ‘하늘이 준’ 기회를 걷어찬 꼴이 돼버려 극심한 내분에 시달릴 전망이다. 지도부 총사퇴는 예견된 수순이긴 하지만 노 대통령의 ‘위기’에 비하면 위기도 아니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이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선 거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김근태 원내대표가 KBS 토론회에서 끝까지 헌재 결정을 받아들이는 데 찬성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힌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정 의장이 탄핵 세력이 다시 결집할 가능성을 경고하며 선거 막바지에 선대위원장에서 사퇴한 것도 여권의 이런 위기의식의 발로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한나라당은 지옥에서 천당으로 ‘승천’한 분위기 속에서 ‘논공행상’이 벌어질 것이다. 선거 초반 75석 정도면 만족이라고 했던 것에 비하면 1백30석 획득은 거의 두 배 이상의 도약이기 때문이다.
우선 박근혜 대표가 총선 승리의 1등 공신으로 떠오르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다. 또한 구시대 인물들의 당내 입지도 크게 약화돼 한나라당의 새로운 메인스트림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차기 대권으로 가는 길의 든든한 지원부대로 탈바꿈할 것이다. 거꾸로 이 같은 박 대표의 도약에 당내 대권주자들의 견제와 압박도 시작될 전망이다. 또한 박세일 선대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뉴한나라당’의 신입 의원들이 정책 개발을 매개로 새로운 계파를 형성해 당의 정체성 바꾸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