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누가? 어떻게? 아무것도 못 밝힌 채 영영…
지난 3월 15일 ‘개구리 소년’ 유가족 대표 김현도 씨(60)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소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는 3월 25일 ‘개구리 소년 실종 사망 사건’ 공소시효를 열흘 남겨 둔 시점이었다.
우철원(당시 13세·성서초등 6년), 조호연(12세·5년), 김영규(11세·4년), 박찬인(10세·3년), 김종식(9세·3년). 1991년 3월 26일 다섯 명의 아이들은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후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 대구 달서구 와룡산 자락에서 모두 유골로 발견되었다. ‘개구리 소년’의 사인은 ‘타살’이었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인에 대한 실마리 하나 잡지 못하고 있다.
연인원 30만여 명이 동원돼 대대적인 수사가 펼쳐졌던 이 사건은 전국적인 캠페인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당시 보도된 기사들은 온 국민이 이들 찾기에 나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종된 대구의 다섯 어린이를 찾아주기 위한 시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경남도에서도 실종 어린이들이 섬에 은신중이거나 무허가 어선 등에 고용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도내에 있는 429개 섬과 항해하는 선박에 대한 일제 수색에 나섰다”(1991년 10월 21일자 보도)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납치돼 어딘가에서 앵벌이를 하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껌팔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의 일을 하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묵는 무허가 하숙집, 여인숙 등지를 집중 단속하기도 했다.
“경상북도는 민방위 주민 신고망을 동원, 개구리 소년 찾기 운동을 펴기로 하고 도내 12만 5000명의 민방위대원과 4만 5000명의 주민 신고 요원들에게 특별 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에 군·경은 물론 공무원, 민간인들까지 대규모 인원이 투입됐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해군이 ‘개구리 소년’ 찾기에 나선 것은 ‘개구리 소년’들이 남해안 일대의 섬에 가 있을 가능성이 큰 만큼 우리 해군도 내 동생, 내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이들 찾기에 적극 나서라’는 ○○○ 해군참모총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1991년 10월 24일자 보도)
한 언론은 이를 두고 “위로는 헬기가 뜨고 물 아래로 잠수부가 투입되는 상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구리 소년’ 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관심은 부작용도 낳았다. 터무니없는 허위 제보나 소문이 돌 때마다 ‘개구리 소년’들의 부모는 상처를 입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또 다른 피해자들도 생겨났던 것이다.
당시 한센인 거주지였던 경북의 칠곡 농원 주민들은 “어린 아이들을 죽여 마을 사람들이 약으로 썼다는 첩보가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어가며 마을 전체를 수색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누명이 벗겨진 뒤에도 주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탓에 아이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기도 했다.
사건 발생 4년 후 대구지방경찰청이 실종 당시 아이들의 얼굴 사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해 네 살이 더 먹은 아이들의 얼굴 모습으로 바꿔 전단지에 실어 전국에 배포했다.
그러던 2002년 9월 26일 실종된 지 11년 6개월 만에 다섯 아이들은 와룡산 자락에서 유골로 발견돼 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
유골 발견 당시만 해도 이 해묵은 숙제는 곧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유골 감식 결과 아이들이 ‘타살됐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수사본부도 “살인범을 꼭 잡아내라”는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10여 년 만에 수사에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도 잠시, 타살 도구를 밝혀내기 위해 2000가지가 넘는 도구가 동원됐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금까지도 범인은 물론 범행 도구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법의학팀이 “유골에 난 외상 흔적이 잔혹하다”며 “정신이상자나 성격 이상자 등이 둔기로 때린 뒤 다시 예리한 흉기로 수십 차례 찌르면서 생겨난 흔적일 수 있다”고 밝혔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오는 3월 25일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유가족 대표 김현도 씨는 유가족들이 그동안 생각한 범인의 윤곽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범인은 둘 이상이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실종된 날은 기초 선거일이었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이 동네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적다. 아이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유인했거나 사건을 은폐하려고 추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 모두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의 수사본부가 있는 성서경찰서 측은 “공소시효가 만료돼도 강력팀 등 18명이 배정돼 있는 수사본부와 3000만여 원의 포상금은 계속 유지될 것”이라면서도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수사를 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며 실제로 이 사건을 계속 수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내비쳤다.
‘개구리 소년’ 유가족들은 지난해 8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유가족들은 경찰이 초동수사에서 타살 가능성을 배제한 채 집단 가출이나 실종 사건으로 처리하면서 사건 발생 7개월 만에야 대대적인 수색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유골 발견 당시 마구잡이식 발굴로 현장이 훼손돼 범인을 잡을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소송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소송은 기각됐고 오는 4월 다시 2차 반론을 제기할 예정이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