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 증거에도 ‘유죄’ 거짓말에 발목 잡혔다
홍콩의 부검의 잎치팡은 죽은 수지의 목에 캔버스벨트가 조여 있는 걸 보고 단순히 질식사로 추정했다. 윤태식은 수지가 머리를 다쳐 죽은 후에 겁이나 목 졸려 죽은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머리 상처의 원인에 대해 윤태식은 어딘가 부딪쳐 생겼다고 하고 수사기관은 불상의 둔기에 의해 난 상처라고 추리했다. 법정 공방의 핵심 쟁점이었다.
#머리에 난 두 개의 상처
1심 법원은 수지의 머리에 나 있는 상처를 이렇게 해석했다.
‘피고인 윤태식은 죽은 수지 김이 피고인을 확 뿌리치다가 어딘가 부딪쳐 넘어졌고 그로 인해 죽었다고 주장을 한다. 부검 결과를 보면 수지 김의 머리 뒤 중앙 부위에 가로 7.5㎝ 세로 4.5㎝, 오른쪽 앞머리 부위에 가로 5.5㎝ 세로 8.5㎝의 심한 좌상이 존재한다. 그중 특히 오른쪽 앞머리 부위의 좌상은 코나 광대뼈 부위에 손상이 없는 점에 비추어 벽이나 방바닥과 같은 평면에 부딪쳐 발생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두 군데 좌상으로 인한 두개골 골절이나 뇌출혈이 전혀 없는 점에 비추어 그러한 머리의 충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수지 김이) 확 뿌리치다가 어딘가 부딪쳐 죽었다는 윤태식의 주장은 믿지 않는다.’
수지 김 머리의 상처는 굉장한 충격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재확인 결과 머리에 난 상처의 정확한 위치는 오른쪽 앞 부위가 아니라 우측임이 판명됐다. 법원은 기본적 사실인 상처의 위치부터 틀리게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그 상처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게 법원의 결론이었다. 두개골 골절이나 뇌출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번복됐다.
시신이 발견됐을 무렵 사체는 부풀어 있었고 대규모의 피부 수포가 형성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터져 있었다. 뇌 역시 연화 또는 액화돼 있어 뇌의 손상 정도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법원의 추정은 그 전제가 무너졌다.
게다가 반대의견이 나왔다. 법정에 소환된 감정의사 한 사람은 상처의 크기로 볼 때 충분히 사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응급의학 전문의도 머리에 나 있는 상처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음을 의미하며 그 같은 외상이라면 충분히 사망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수지 김 머리에 두 개의 상처가 난 원인이 무엇인지, 그것으로 인해 죽었는지 아니면 기절해 있다가 나중에 목 졸려 죽었는지 법원은 밝히지 못했다.
#혀 깨물린 자국
1심 법원은 죽은 수지 김의 혀에 난 상처를 이렇게 분석했다.
‘사람이 목을 졸릴 때는 혀 양쪽에 깨문 자국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보통 때 무의식적으로 깨물 때는 한 쪽만 물지 양쪽을 깨물지는 않는다. 또 사람이 죽고 나서 사체의 부패로 인해 혀가 입 밖으로 돌출될 때는 깨물린 자국인 이른바 바이트 마크가 생기지 않는다.
보통 혀를 깨문 자국이라는 것은 단순히 상악과 하악 치아 사이에 혀가 끼어 눌려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혀를 절개했을 때 치아 사이에 끼어 있는 부위에 깨물려 발생한 출혈이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출혈이 있다는 것은 혀를 깨물 당시 심장이 박동하여 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혈압을 유지했다는 것으로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질식사의 경우는 미세하지만 심장과 폐의 출혈도 나타난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수지의 죽음은 끈에 의한 질식사로 추정된다.’
홍콩의 부검전문의 잎치팡이 국내에 들어와서 직접 증언대에 섰다. 그는 부검 당시 혀를 절개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심장과 폐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출혈은 꼭 목 졸려 죽는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는 경우에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1심 법원의 질식사 논리들이 뒤집어졌다.
#질식사의 증상
미국 부검의협회에서 1999년 연례회의 때 발표한 보고서가 있다. 텍사스주의 부검의 빈센트 디 마이오는 1985년 1월 1일부터 1998년 12월 31일까지 48건의 끈으로 목 졸려 죽은 사람들의 상황을 조사했다. 그중 86%가 안검결막과 안검망막에서 ‘일혈점’들이 나타났다. 또 성대연골과 갑상연골의 파열상들을 보였다.
법 의학책들은 목 졸려 죽은 경우 목 안의 연조직에서 흔히 출혈을 보이고 졸린 부위의 위쪽에 일혈점이나 심한 울혈을 보인다고 전한다. 그런 현상은 구강, 인두, 편도 및 설근부에서 특히 뚜렷하다고 했다. 그런데 죽은 수지를 검사한 의사 잎치팡의 보고서를 보면 구강 내에 아무런 손상이 없고 목 근육에도 아무 좌상이 없다고 되어 있었다. 성대부 파열도 없었다. 강한 압박으로 설골이 부러지거나 손톱 등에 반항한 흔적도 없었다.
목이 졸릴 때는 본능적으로 살인자의 손이나 다른 부위를 할퀸다. 또 몸부림치며 방어를 하느라고 목에 자국이 남는다. 그런데 수지 김의 시신에선 그런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1심 법원의 판단은 이랬다.
‘사체의 목 중간 부위에는 캔버스벨트가 꽉 조여져 묶여 있었다. 희미하지만 목 부위에 벨트로 인한 자국이 환형으로 나타나 있었다. 이 사건과 같은 넓은 벨트로 목을 졸랐다면 설골 부위의 골절이나 손상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죽은 수지의 손톱이나 목 등에 방어흔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끈으로 목을 졸릴 당시 의식이 없었다고 보인다. 그런 상태에서는 설골에 손상을 줄 정도로 강하게 끈을 잡아당기지 않아도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사망원인은 끈에 의한 질식사라고 할 것이다.’
#큰대자로 누워 있던 시신
큰 대(大)자로 굳은 채 발견된 수지의 시신에 대한 법원의 추정적 해석은 이렇게 계속됐다.
‘윤태식의 주장은 수지 김이 밤 0시 20분경 어딘가에 부딪쳐 모로 넘어져 죽은 걸 그대로 놔뒀다가 아침 7시경 사체를 그 상태 그대로 침대 밑으로 숨겼다고 한다. 당시 홍콩의 실외온도가 18.3℃ 내지 19.7℃여서 이러한 온도 하에서는 사후 7시간 내지 8시간 정도면 ‘강한 저항’을 주는 정도의 시강이 형성될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 같은 실내는 온도가 더 높아서 더 빨리 시체가 강직현상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비추면 옮길 때 사체의 상태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는 윤태식의 진술은 믿기 어렵다.’
법원의 판단은 사체가 큰 대자로 누워있는 데 대한 해석이 아니라 윤의 거짓말들을 반박하는 것으로 궤도수정되었다. 윤태식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지가 모로 누운 채 굳어 있어야 했다는 논리였다. 결국 큰 대자로 누워 있는 모습의 원인에 대한 법원의 직접적인 해석은 없었다. 1심 법원은 그에게 살인죄의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변호인단의 반박이 치열했다. 그러나 항소심 법원도 만만치 않았다. 과학적 증명의 부족에 대해 항소심 법원의 판결문은 이렇게 전제하면서 시작됐다.
‘어떤 사체의 사망원인은 사체 자체로부터 인식할 수 있는 징후에만 의존해 판단할 것은 아니다. 상황정보를 토대로 검시나 부검 등 사체로부터 얻은 소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판단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의사의 과학적 결론이 절대가 아니라 판사가 상황을 추정해서 살인죄로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윤태식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법원의 단호한 결의가 서린 느낌이었다. 판결문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윤태식은 살인죄로 구속된 이후 검찰에서 15차례에 걸쳐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 7회 조서 작성 시까지 자신은 수지 김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하다가 8회 조서 작성 시부터 말을 바꾸어 수지 김이 자신을 뿌리치고 나가다가 어디 부딪쳐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안기부에서 예전에 만들었던 자료가 오면서 진술이 또 달라졌다.’
판결문은 윤태식이 거짓말쟁이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또 다른 허위성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꼬집고 있었다.
‘머리의 상처를 보면 크게 두 군데 좌상이 나 있다. 두 상처의 크기로 보면 비슷한 정도의 외부적 충격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피고인 윤태식은 꽝 하는 소리를 한 번밖에 듣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부딪치는 소리가 두 번이 나야 맞는 것이다. 윤태식은 수지 김이 어딘가에 쾅 부딪혀 넘어져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고 어깨를 흔들어보고 물을 떠먹여봤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죽었다고 단정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의식을 잃으면 호흡이나 맥박을 확인해서 그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그는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가 진술하는 그런 방법만으로 수지가 죽었다고 단정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윤태식은 굳이 시체를 침대 밑에 숨기고 가정부로부터 아파트 열쇠를 회수해 오는 등 사체의 발견을 지연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수지가 정말 그를 뿌리치고 나가다가 어딘가에 부딪쳐 죽은 것이라면 단지 그러한 폭행치사 정도로 처벌이 두려워 사체를 숨기고 북한대사관으로 도망하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자회견을 한 것으로 믿기 어렵다.’
법원에서 상정한 것은 완벽한 인간이었다. 냉철히 호흡과 맥박을 조사하고 자신에 대한 처벌이 폭행치사죄일지 살인죄일지를 예견해서 처신하는 인간형이었다. 하지만 극장에서 불이 났을 때 우왕좌왕 문도 찾지 못하는 게 인간들의 보통 모습이었다.
그런 판단결핍증은 똑똑하다는 인간도 상황이 닥치면 마찬가지라고 했다. 윤태식을 불신하는 판결이유는 이렇게 계속됐다.
‘윤태식은 안기부에서 작성한 진술서와 조서들은 안기부가 자신을 협박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기부 서류들의 작성 시기는 사체가 발견되기 전이므로 안기부가 진술서와 조서를 의도적으로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수지 김은 끈에 의해 질식사한 것이다.’
나중에 안기부 수사관은 그들이 불러준 대로 윤태식이 진술서를 작성한 것이라고 했다. 협박용으로 작성한 사실도 인정됐다. 판결이유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윤태식, 네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니까 수지는 끈에 의해 목 졸려 죽은 거로 단정할 수밖에 없어.’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