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들 두 사람이 자웅을 겨루는 형국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정가 일각에서 오는 5월 말 혹은 6월 초순께를 고비로 해서 두 당대표가 ‘일선’에서 물러날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지난 1월 2년 임기 당의장직에 선출된 정 의장은 아직 임기가 1년 8개월가량 남아 있다. ‘노인 폄하’ 발언 등으로 물의를 일으켜 결국 총선 직전 선대위원장직과 비례대표 후보를 사퇴하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총선에서 과반 이상 의석을 확보한 만큼 ‘의장의 책임을 다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정 의장은 총선 직후 박근혜 대표와의 대화를 촉구하는 등 책임 있는 여당 대표로서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향후 정 의장의 위상과 관련해 당내에선 선출직 의장인 만큼 임기를 채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정 의장 주변과 당내 일각에선 ‘정 의장이 당의장직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 의장 주변의 한 당직자는 “의원직이 없는 상태에서 여당 대표직을 수행하기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며 “열린우리당이 원내정당화를 지향하면서 정작 당의장이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은 여야관계 등에서 난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이번 16대 국회의원 임기는 오는 5월29일에 끝나고 5월30일부터 17대 의원의 임기가 개시된다.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한 인사는 “정 의장은 대통령 탄핵에 대한 정치적 해결 문제를 매듭짓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한나라당 박 대표와의 의견 조율이 성공하거나 혹은 정치적 타협 실패 이후 맞이할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올 시점이면 의원 임기도 끝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인사는 “정 의장이 원내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점인 이번 의원 임기 내까지 이번 17대 총선과 연계된 일들을 마무리한 후 ‘명예롭게’ 퇴진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정 의장의 ‘퇴진’에 대한 예측이 단지 ‘정 의장이 17대 국회의원직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번 총선을 통해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떠오른 만큼 정 의장은 여야 공방 과정에서 계속 공격을 받거나 당내 ‘잠룡’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을 수 있다. 정 의장의 한 주변인사는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당의장으로서의 좋은 이미지를 남긴 채 잠시 의장직에서 떠나 있다가 적절한 시점에 원내에 복귀해 대권 행보를 밟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총선에서 선거법 위반 사례가 많은 만큼 재보궐 선거에 정 의장이 다시 등장해 ‘화려한 컴백’을 꿈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가에선 정 의장의 ‘입각설’이 나돌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고건 총리가 “총선이 끝나면 물러나겠다”고 밝힌 바 있어 노 대통령 탄핵 심판이 마무리되면 총리직을 비롯해 상당수 장관직 교체가 단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총선 직후 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의중을 인용해 ‘정치인 출신 장관 임명’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우선적으로 이번 총선에서 낙선한 이부영 김정길 이철 전 의원 등에 대한 배려 차원의 입각이 예상되는 가운데 정 의장의 행정 경험 축적을 위한 입각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영선 대변인은 이러한 입각설에 대해 “입각 여부는 민감한 사안이며 당내에서 아직 공식논의가 진행된 것은 없다”고 밝혔지만 정 의장 주변에선 이미 그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상태다.
한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거취 문제 역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3월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최병렬 전 대표의 잔여 임기를 채울 ‘임시 대표’로 선출된 박 대표의 임기는 이번 6월로 끝나게 된다. 따라서 6월 중순께 열릴 전당대회에 박 대표가 다시 출마할 것인지에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
현재로선 ‘박 대표가 당분간 당의 간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노 대통령 탄핵안 가결 사태 이후 ‘1백석도 어렵다’는 절망적 예측이 나돌았지만 박 대표는 선거현장을 누비며 한나라당이 1백21석 의석을 확보한 점이 박 대표의 ‘가치’를 높여준 것.
실제로 그동안 박 대표의 지지기반 역할을 해준 당내 소장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박 대표가 계속 대표직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을 규합하고 거대 여당에 대항하는 데 박 대표만 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대안부재론’도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지금은 박 대표에게 다시 없는 기회다. 전당대회에 출마한다면 압도적 지지로 당대표직에 다시 오를 수 있을 것이며 대권 행보에도 한층 유리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박 대표가 6월 전당대회 출마를 강행할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우선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혼자 다 하다시피 했던 박 대표의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인사들도 있다.
한나라당 선대위의 한 관계자는 “박 대표가 체력적으로도 지쳐 있지만 정신적으로도 무척 지친 상태”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박 대표와 가까운 몇몇 인사들은 박 대표가 보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오는 6월 전당대회에 출마하지 않고 일단 ‘숨고르기’를 하며 ‘내공’을 쌓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당 일각에서 “당의 ‘구원 투수’로 나서서 ‘세이브’를 올린 박 대표가 향후 ‘선발 투수’로 나설 생각이라면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당내 한 인사는 “박 대표가 당권을 다시 쥐고 활동할 경우 다른 대권 주자들의 집중 견제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도 고려할 만한 카드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6월에 선출될 예정인 새 당 대표의 임기는 2년. 이번이 아니더라도 박 대표에겐 당권에 도전할 기회가 남아 있는 셈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현 정국의 양축인 정동영 의장과 박근혜 대표가 오는 6월을 전후로 ‘일선’에서 물러날 가능성이 정가에서 거론되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향후 행보가 어찌 되든 이들은 결국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