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리고 고문한 수사관 “윤태식과는 인간적인 관계”
▲ 윤태식(왼쪽), 수지 김 | ||
안기부 수사관이었던 김○○ 씨는 결정적인 증인이었다. 그가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빠진 재판이었다.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서울과 싱가포르를 오갔던 비밀전문이 나와야 했다. 그것도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장만이 그 핵심 증거들이 법정에 나가게 할 수 있었다.
김 씨가 증인으로 예정된 법정 안은 항상 적막했다. 윤태식 담당 변호사 그리고 몇 명의 변호사들이 무료한 듯 앉아 있었다. 김 씨가 나올 거라고는 모두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밀전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재판장이 법정 뒤쪽 문을 통해 법대로 나와 앉았다.
“오늘도 역시 증인 안 나왔죠?”
재판장은 당연하다는 듯 텅 빈 방청석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나왔습니다.”
정부 측 최 변호사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재판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방청석 뒤쪽에서 오십대 말쯤으로 보이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몸집의 남자가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김○○ 씨 되세요?”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김 씨의 붉은 눈에서는 강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푸른색이 도는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국가 측을 대리하는 최 변호사가 덧붙였다.
“87년 당시 안전기획부와 싱가포르 사이에 오고갔던 전문도 가지고 나왔습니다. 국가기밀이기 때문에 재판부만 보셨으면 합니다.”
김 씨의 출석과 비밀전문의 등장은 이변이었다. 그건 현 정부가 당당하게 모든 진실규명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국가정보원장과는 사석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담백하고 정직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인격만큼 사회도 맑아졌다. 김 씨가 선서 후 증인석에 앉았다.
“김○○ 씨, 참 어렵게 이 법정에 나오셨네요.”
재판장이 한마디 했다.
“변호인! 신문하시죠.”
재판장이 명령했다. 윤태식 담당 변호사가 묻기 시작했다.
“증인은 1987년 1월 8일경 윤태식을 김포공항에서 인수해서 안전기획부로 데리고 가셨죠?”
“그렇습니다.”
“구속영장을 발부받았습니까?”
“예, 발부받았습니다.”
“언제 영장을 발부받고 며칠간이나 윤태식을 구금했습니까?”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하여튼 영장을 뗐습니다. 당시 대공 사건은 조사기간이 상당히 길었습니다. 날짜들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영장은 며칠짜리를 발부받으셨습니까?”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당시 대공수사는 전부 20일짜리로 알고 있습니다.”
“윤태식은 당시 안기부에 80일간 잡혀 있었다고 하던데 기억합니까?”
그렇다면 60일간을 불법으로 구금을 했다는 얘기였다.
“대충 그런 걸로 아는데 정확히는 모릅니다.”
김 씨가 얼버무렸다. 그때 재판장이 김 씨를 보고 물었다.
“영장기간보다 수사를 오래한 건 맞죠?”
신문을 하던 담당 변호사가 측면에서 협공했다.
“80일짜리 영장은 없잖습니까?”
듣고 있던 김 씨가 맞받아쳤다.
“원칙대로 영장기간인 20일을 수사하고 송치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실무를 담당했던 수사관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변호사가 다음 질문을 했다.
“공항에서 데리고 온 윤태식이 수지 김의 사망을 얘기한 건 언제입니까?”
“데리고 온 후 아마 3~4일쯤 됐었나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떠올리는 모습이었다. 그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 말했다.
“아니, 4~5일쯤 후에 했을 겁니다.”
당시 안전기획부 간부들은 전부 윤태식이 잡혀 온 그날 저녁 바로 살인을 자백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변호사가 책상 위에서 서류 한 장을 들어 김 씨에게 보였다.
“이 진술서를 작성하신 사실이 있죠?”
“그거 제가 쓴 겁니까?”
김 씨가 돋보기를 꺼내면서 되물었다. 그 역시 이미 노안인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직접 자필로 쓰신 거니까 확인하세요.”
변호사가 진술서를 가져다주면서 말했다. 김 씨는 노란 뿔테 돋보기를 쓰고 진술서를 한 줄 한 줄 신중하게 읽으면서 확인했다.
“작성 경위가 어떻게 되죠?”
변호사가 물었다.
“2003년 1월경 윤태식의 담당 변호사가 저를 찾아와서 부탁하는 바람에 써 준 것 같은데요.”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대답이었다.
“그게 아니죠. 당시 증인은 다른 사건에서 피고인이 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과정에서 써 주신 거 아닙니까?”
진술서에는 그 스스로 쓸 리가 없는, 고문을 자인하는 내용이 있었다.
“제가 그 진술서를 써 준 동기는 생각이 안 납니다.”
김 씨가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변호사가 질문을 계속했다.
“윤태식이가 좀 맞긴 맞았죠.”
김 씨가 말했다. 그런 놈은 좀 맞아도 괜찮다는 의식이 표정 속에서 들여다보였다.
“물고문도 하셨죠?”
변호사가 물었다.
“기억이 안 나는데요.”
김 씨가 부인했다.
“윤태식이 수지 김을 죽였다고 바로 얘기하던가요?”
변호사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알리바이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수지 김이 죽은 걸 얘기했습니다.”
“윤태식이 수지 김을 죽였다고 스스로 얘기하던가요?”
“오래 된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김 씨가 한 발 뺐다.
“처음에 윤태식은 부부싸움 끝에 수지 김이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고 하지 않던가요?”
“진술이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에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김 씨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했다.
“윤태식이 말한 과정을 잘 기억해서 말씀해 주시죠.”
변호사가 부탁했다. 김 씨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윽고 김 씨가 말했다.
“맨 처음에는 윤태식이가 수지 김을 죽였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정황을 들어보고 얘가 틀림없이 죽인 것 같다고 생각한 거죠. 부부싸움을 했다는 건 틀림없고요. 그래서 수사 초점을 윤태식이가 수지 김을 죽인 게 아닌가 단정하고 집중적으로 추궁했죠. 윤태식이가 수지 김과 싸웠는데 벽에 부딪치기도 하다가 결국 목 졸라 죽였다고 자백했어요.”
“각목으로 패고 물고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백합디까?”
변호사의 목소리가 약간 격앙되어 있었다.
“제가 집중적으로 추궁한 건 사실입니다.”
김 씨가 우회해서 대답했다.
“윤태식이 수지 김이 간첩이라고 말했던 사실이 있습니까?”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수지 김의 가족까지 남산 지하실에 데려다 조사한 사실이 있지요?”
“아닙니다. 전 윤태식만 조사했어요. 왜 싱가포르에 갔는지 그리고 왜 죽였는지만 조사하고 나머지는 모릅니다. 기자회견이나 그 부분은 또 다른 사람이 조사했어요.”
“살인죄로 조사했다면 왜 송치를 하지 않았어요?”
“전 보고만 했지 그 이후는 모릅니다. 살인죄로 영장이 발부됐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김 씨가 말했다.
“아까 처음 신문을 시작할 때 영장이 발부됐다고 했잖아요?”
“그 말은 정정하겠습니다. 공작적 차원의 일이라 실제로 영장이 발부됐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 씨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 말을 바꾸었다.
“석방 후에도 윤태식을 관리한 게 맞죠?”
변호사가 물었다.
“관리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윤태식 문제가 북측의 방송에서도 나왔고 홍콩하고도 외교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윤태식이 엉뚱한 일을 벌일 염려도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간간이 윤태식을 만나 뭐하고 지내냐고 묻는 정도의 동향파악을 했습니다.”
“도청도 했죠?”
변호사가 따졌다.
“아닙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내가 보장한다니까요. 조직에서 관리한 게 아니라 나 혼자서 관리했습니다. 감청을 하려면 그걸 하기 위한 절차와 조치가 필요한데 전 하지 않았습니다.”
“윤태식을 언제까지 관리했죠?”
“제가 89년 초 지방으로 전출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했습니다. 다른 요원이 윤태식을 관리하지는 않았어요. 윤태식 서류도 계속 내가 보관했었습니다. 그렇게 지방에 3년간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는데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윤태식을 다시 만나봤죠.”
“윤태식이 외국으로 나가려다가 안기부 직원에게 여권을 빼앗긴 적이 있는데 알죠?”
변호사가 물었다.
“예, 압니다. 제가 한번은 궁금해서 개인적으로 윤태식의 출입국동향을 파악해 보니까 중국에 갔다왔더라고요. 제가 분명히 출입국을 금지시켰는데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파악해 보니까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조작해서 해외에 나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부탁해서 출국을 정지시켰죠.”
“검찰이 나중에 윤태식의 살인죄에 대해 수사를 시작할 무렵에도 증인은 윤태식을 자주 만났죠?”
“자주 만났죠. 그때는 제가 퇴직을 한 이후입니다.”
“계속 감시하고 동향을 파악했죠?”
“퇴직 이후 동향을 파악했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전 사실 윤태식이 걔한테 잘해줬어요. 걔가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제가 만날 때마다 3만 원도 주고 5만 원도 주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패스21이 붕 뜬 거죠. 저하고는 인간적으로 만난 거예요.”
그 말을 듣는 변호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증인은 윤태식의 머리를 땅에 박게 하고 성기를 발로 차기도 했다는데 어떻습니까?”
변호사가 감정을 자제하면서 물었다.
“걔가 맞긴 좀 맞았죠.”
김 씨가 대답했다.
“윤태식이 얻어맞고 부천세종병원에 입원했던 거 아시죠?”
“모르겠는데요.”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때린 적 없어요?”
“그건 전부 윤태식이 거짓말하는 거예요. 남산 안기부 앞에 있는 일신다방 같은 데서 윤태식이를 여러 번 만난 건 사실이에요. 윤태식이가 방면된 후에 또 사기로 걸릴까봐 제가 달래곤 했어요. 앞으로는 정직한 사람이 돼서 성실하게 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제가 뒤에서 여러 가지로 도와줬죠. 어쨌든 윤태식이와 저는 잘 지냈어요. 그리고 전 항상 윤태식에게 주의를 줬죠. 범법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이죠.”
“상부의 명령이 없는데도 윤태식을 개인적으로 계속 관리한 이유는 뭐였죠?”
변호사가 물었다.
“윤태식이가 개인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면 저의 공직생활 신상에 지장이 생길까봐 그랬습니다.”
변호사가 신문을 끝냈다. 지켜보고 있던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사법부에 의해 불법수사와 고문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