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도 복수도 버렸다 그저 한뼘 자유만…”
유성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눈송이가 하나둘 날리기 시작했다. 택시는 바로 대전의 외곽으로 빠져 산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생활하다가 출소한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재심을 신청해 달라고 호소했다. 교도관들도 입이 마르게 그를 칭찬했었다. 감옥 안은 이기주의가 짙게 깔린 곳이다. 거기서 모두에게 칭찬받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산기슭에 눈모자를 쓰고 납작 엎드린 교도소 안의 가건물이 변호사접견실이었다. 입구 철책상에 앉아 있던 교도관이 나를 보자 반색하면서 입을 열었다.
“세탁반장 조간우가 목을 빼고 기다렸습니다. 괜찮은 사람입니다. 좀 도와주시죠.”
젊은 교도관의 목소리에는 진정이 배어 있었다. 접견실의 유리박스들에서는 면회 온 인권위원회 사람들, 형사들, 변호사들이 재소자와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노트북 컴퓨터를 놓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 조서를 쓰는 형사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새마을 모자를 쓴 사십대 초쯤의 남자가 앞에 나타났다. 굵고 짙은 눈썹 아래로 눈이 고운 얼굴이었다. 깨끗하게 빨아 다림질한 청색 재소자복의 주름은 손을 대면 베일 것 같았다. 왼쪽 팔에는 완장을 끼고 있었다.
“밖에 눈이 많이 오네요.”
내가 날씨로 인사를 했다. 눈은 마음을 활짝 열곤 했다.
“변호사님 사는 세상은 눈이 낭만이지만 이런 날 감옥 안의 저희는 고역입니다. 운동장에 쌓인 눈을 재빨리 치워야만 해요. 그래야 운동을 할 수 있거든요. 하루 30분간 허용되는 운동시간이 재소자에게는 정말 포기할 수 없는 값진 거예요.”
비행기 조종사에게 새는 귀찮은 존재지만 감옥의 죄수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게 입장에 따라 달랐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다고 들었는데요.”
내가 수첩을 꺼내들고 필기 준비를 하면서 물었다.
“지금까지 15년 4개월을 징역 살았어요. 감옥의 창살만 보면 목을 매달고 싶었죠. 잘못 태어난 저 같은 인생이 나이 마흔을 넘겼으면 정말 충분히 살았죠. 그런데 한이 서려서 못 죽었어요. 살인 누명을 풀 때까지 전 죽지 못해요.”
뭔가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세월이 흘렀다.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법은 증거다. 억울해도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동안 억울한 사정에 대해 호소해 봤어요?”
내가 물었다.
“저는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면 제일 미워요. 말해 볼까요? 살인죄가 확정돼서 징역 오니까 제일 먼저 교화위원이라고 해서 종교인들이 오더라고요. 전 아무나 붙잡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왔으니까 살려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죠. 처음엔 찾아온 목사보고 살려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어땠는지 알아요? 나를 싹 끊어버리는 거예요. 다신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천주교 신부에게 고백하고 부탁했죠. 저는 억울하다고. 그랬더니 그 신부란 자는 고해성사에서 알게 된 비밀은 남에게 얘기할 수 없다면서 뒤로 빼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사형수를 보살피는 것으로 유명한 스님을 찾았어요. 안 되더라고요. 난 종교인이라고 하면 싫어요. 변호사님도 혹시 전도하러 왔으면 아예 관두슈.”
종교인의 또 다른 위선적인 이면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한번은 변호사가 찾아왔어요. 내 얘기를 다 듣더니 끄덕이면서 선임계를 작성하는 거예요. 전 정말 하나님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이놈의 변호사도 결국 돈을 주지 않으니까 그걸로 끝이에요. 공연히 한 달 정도 기분만 좋다가 끝났어요. 돈 없이 되는 일이 있겠어요?”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원망이 계속됐다.
“여기 근무하는 교도관들에게 제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었어요. 친하다가도 그런 소리만 들으면 그때부터 슬슬 피하더라고요. 사실 이해는 하죠. 그 사람들 무슨 힘이 있겠어요? 이 안에서 모포 한 장 더 주는 권한 정도는 있겠지만 사회에 나가면 무력한 게 그들 교정공무원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난 출소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억울한 얘기를 했어요. 15년 징역을 사는 동안 1000명쯤에게 했을 거예요. 1000명째 하소연하니까 오늘 엄 변호사님이 온 거예요. 나 공짜로 변호해 달라고 안해요. 돈 드릴게요. 제가 15년 동안 이 안에서 번 돈이랑 여기 사람들이 걷어준 1000만 원 있어요. 지금 당장 줄게요.”
그의 얼굴에 피어나는 희망을 보면서 난감했다. 현실적으로 해결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었다.
“어려서 뭐했어요?”
난 그의 지난날을 알고 싶었다.
“청계천 3가에서 거지 노릇을 했죠. 왜 고가도로 밑에 리어커들 세워놓는 데 있잖아요? 그 사이에서 살았어요. 깡통 들고 나가 얻어온 밥을 거지 형들하고 연탄불에 데워 같이 먹었던 게 좋았어요. 후암동 쪽에 부자들이 많이 살아서 가끔 원정을 갔어요. 어떤 때는 1000원을 얻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 때면 봉래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봤는데 정말 행복했죠. 공짜로 담 넘어 들어갔었는데 돈이 생긴 날은 20원 정식으로 주고 동시상영 영화를 봤어요.”
순간 그의 표정에는 행복의 빛이 스쳤다.
“열네 살 때 말이죠. 포주 딸이던 숙경이를 좋아했는데 그 애하고 이태원으로 도망가서 몇 달 살았어요. 나중에는 삐끼도 해주고…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어요. 올림픽을 한다던 88년 여름 아주 더운 날이었을 거예요. 아이들하고 한강 고수부지로 놀러갔어요. 그런데 건달들이 몰려와서 우리들에게 시비를 걸었어요. 다구리 붙었죠. 상대편 애 중 한 명이 물에 빠져 죽었어요. 신고를 받고 출동한 파출소 순경이 나보고 참고인 진술을 받고 가라는 거예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어요.
내가 본 대로 말했죠. 바로 나올 거로 생각했는데 상황이 그게 아닌 거예요. 본서로 넘겨졌는데 강력계 형사들이 한 세 시간 동안 절 반쯤 죽이더라고요. 저도 매 맞는 데는 이골이 나서 그 정도 터지는 건 고문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형사들이 다섯 시간쯤 나를 두들겨 패다가 (범인이) 아닌 걸 알더라고요. 때리는 걸 중단하고 조금 있는데 형사반장이 저한테 와서 제의를 했어요. 범인이 아닌 걸 아니까 그냥 나가라구요.
말하는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저는 거지라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검찰은 배운 사람이라 검사에게 가서 얘기하면 살려주겠지 생각했어요. 그때 저를 담당했던 검사가 김○○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 발목을 잡고 엎드려 15일 동안 사정했어요. 그랬더니 그 양반 저보고 ‘이 새끼 검찰에 와서 부인한다’면서 증거보전신청하고 현장검증도 해야겠다는 거예요. 신기하게도 증인들이 잘 나오더라고요. 제가 데리고 간 아이들은 대개가 가출한 아이들이라 찾기 힘든데 경찰이나 검찰이 한 여관에서 합숙이라도 시켰는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나와서 내가 살인범이라고 했어요. 검사가 매일 불러냈어요.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검찰청에 있는 비둘기장에서 꼼짝 못하게 했어요. 또 어떤 때는 검사실에 가면 책상 위에 있는 긴 자로 얼굴을 막 때리고 또 어떤 사람은 밟고 이놈이 패고 저놈이 패고 정말 죽겠더라고요.
매일 불러 조지는데 차라리 죽였다고 하면 다시는 검사가 부르지 않을 것 같았죠. 그래서 마지막에는 ‘그래 내가 죽였다’고 하니까 조용해졌어요. 재판이 열리니까 좀 정신이 났어요. 그래서 줄기차게 부인을 했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추가가 뜨는 거예요.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다른 아이들과 절도를 한 게 있는데 그게 기소가 된 거예요. 그건 진짜 내가 했거든요. 결국 그렇게 전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받았죠.”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현실 수사는 그렇게 되어온 면도 있었다.
“내가 해줄 일이 뭐죠? 난 해줄 게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그를 보면서 물었다. 나는 그가 희망하는 것 같은 상상의 명변호사가 아니었다. 또 한 사건을 가지고 끝까지 따라가는 소설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없었다. 어디 가 사는지 모를 증인도 찾을 능력이 없었다. 그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누군가 나를 찾아와 주길 바랐어요. 그리고 내 말을 들어주길 기다렸어요. 오늘 와 주셔서 그냥 감사해요.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냥 ‘살려 주세요’ 그 한마디를 하고 싶었어요.”
그는 누군가에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의 죄수 빠삐용처럼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15년 만에 나타난 나를 놓치기 싫은 듯 그의 원망이 터져나왔다.
“제가 여기서 살아보니까 말이죠. 하나님이라는 사람은 인간 세상에는 정말 관심이 없는 양반이에요. 누가 억울하거나 말거나 죽거나 상관하지 않아요. 목사들에게 말하면 죽은 다음에 저 하늘나라에 가서는 모두가 공평하게 심판을 받고 천국으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전 필요 없어요. 이 지상의 일에도 관심이 없는 하나님이 거기서 과연 잘할까 의심해요. 난 저세상에 가서 지옥 불에 떨어져도 좋아요. 그냥 이 세상에서 억울한 살인 누명이라도 벗었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그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접견실에선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석유난로의 불이 사그라졌다. 창 밖에는 어느새 몇 송이 날리던 눈이 함박눈이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누가 원망스러워요?”
내가 물었다.
“15년이 지났는데도 그 검사를 잊을 수 없어요. 내가 15일 동안 발목을 붙잡고 꿇어앉아 빌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도 그 검사에게 15일 동안 사과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복수하고 싶었어요?”
내가 물었다.
“처음에는 보이는 족족 다 죽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죽지 않았어요.”
“지금은요?”
“지금은 그런 마음은 사그라지고요, 잠깐이라도 나가서 아빠도 되고 싶고 월급도 받고 살고 싶어요. 여기 손바닥만 한 운동장이 아니라 북한산이라는 데를 발로 밟고 올라가 봤으면 좋겠어요. 사실 전 사회 있을 때부터 그 흔한 불고기 한번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나가서 한 달 정도 연애 한번 실컷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전 열여덟 살 때부터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감옥에서만 살았거든요.”
잠시 후 나는 교도소 밖에 펼쳐진 들판으로 나왔다. 막차가 끊긴 벌판으로 눈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냥 걸었다. 그가 편지를 계속했다. 살려달라고. 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1년 후 마지막으로 편지가 왔다.
“변호사님은 순간순간이 행복이지만 전 순간순간 불행입니다. 도와주세요.”
난 무기력했다. 또다시 그는 나를 욕할지도 몰랐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