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지난 4월23일 부산경남 당선자들과 면담을 하는 정동영 의장-이종현 기자jhlee@ilyo.co.kr. (가운데)지난 4월15일 총선 개표상황을 지켜보는 김근태 원내대표-시사주간지공동취재단. (오른쪽)‘중용설’이 나돌고 있는 김혁규 전 지사.지난 4월23일 부산경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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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대권주자인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의장직 임기 2년을 채울 생각이 없다”(23일)고 전격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권 유지를 통해 ‘세(勢) 불리기’에 나서느냐, 아니면 2007년 대선 당내 경선과 본선을 대비해 행정경험 축적 등 차분히 ‘대권수업’을 받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한 셈이다.
정 의장의 선택은 그를 포함해 여권 내에서 차기 대권과 관련해 ‘삼두마차’로 불리는 김근태 원내대표와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의 진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총선을 전후해 당내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정 의장이 자신과 반대로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는 김 대표와 김 위원을 겨냥해 ‘의장직 사퇴’라는 견제구를 날린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정 의장 사퇴 선언 등으로 촉발된 여권 내 차기 대권 구도 변화에 노무현 대통령의 의중이 개입됐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이 여권 내에서 차기 대권 경쟁이 조기에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 ‘차기 3인방’을 입각 등을 통해 당무 일선에서 배제시키고, 대신 열린우리당은 ‘관리형 지도부’가 이끌도록 해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주력하도록 하려는 것이란 얘기다. 이미 가열되기 시작한 여권 내 차기 3인방의 견제와 경쟁, 그리고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관리대책을 추적해 봤다.
대권 구도와 관련한 변화를 논하자면, 우선 단초를 제공한 정 의장의 사퇴 선언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정 의장은 지난 23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당헌·당규 개정 등 당 체제 정비가 일단락된 후 열릴 전당대회를 전후해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대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여권 내에선 정 의장이 5월 중엔 구체적인 거취를 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여권 내에선 정 의장의 사퇴 결심의 직접적인 계기는 총선기간 내내 그를 괴롭혀 온 “60~70대 이상은 투표 안해도 된다”는 이른바 ‘노인 폄훼’ 발언의 후유증으로 보고 있다. 한때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원내 과반을 넘는 1백52석을 확보하면서 정 의장이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총선 후까지 정 의장의 책임을 강하게 주장해온 쪽은 이번 총선에서 ‘노인 폄훼’ 발언으로 가장 큰 데미지를 입은 영남권 낙선자 그룹이다. 이미 선거기간 중 정 의장에게 선대위원장·비례대표 사퇴는 물론 의장직까지 내놓고 ‘백의종군’하라고 요구했던 이들은 정 의장 등 당권파를 중심으로 나오는 ‘4·15총선 승리=정동영 역할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계속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 지난 3월21일 직무정지 상태인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서류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다. | ||
경남의 또 다른 낙선자는 “지금 상태로는 6·5 부산시장, 경남지사 보궐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없으며, 정 의장이 사퇴하는 등 민심을 되돌릴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며 가세했다.
정 의장으로선 총선 승리의 ‘1등 공신’ 대접은 못 받을지언정 오히려 당내 공세의 표적이 되는 상황에 상당히 고민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당권 유지’ 쪽으로 기울었던 정 의장이 ‘의장직 사퇴’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노인 폄훼’ 발언의 후유증을 극복 못해 계속 생채기를 입는 것 보다는, 당무 일선에서 물러나 내실을 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의장직 사퇴 후 진로에 대해선 현재로선 입각 쪽에 무게가 실려 있지만 다른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는 것이 정 의장 주변의 전언이다. 입각설과 관련, 정 의장은 20일엔 “(입각설 등은) 정치적 상상력에 불과하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사퇴 방침을 밝힌 23일엔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가능성을 열어 둬 눈길을 끌고 있다. 부총리급 각료로 이동할 것이란 얘기가 구체적으로 나오는가 하면, 입각이 여의치 않다면 10월 재·보선 출마와 아예 외국 유학에 나서는 방안이 일각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정 의장의 향후 행보가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사퇴 선언, 정확히는 ‘사퇴 예고’가 김근태 원내대표와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의 향후 운신에 제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다.
우선 김 대표의 경우 5월 중 실시될 원내대표 경선에서 연임에 성공할 경우 ‘날개’를 달 것이란 평가가 많았다. 과반 이상 의석을 가진 여당의 원내 사령탑으로서 정치적 비중과 권한이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 대표 주변에서는 정 의장이 ‘원외’인 점을 감안할 때 김 대표가 당내 주도권 장악과 차기 대권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것이란 기대를 표시했다.
그러나 정 의장이 사퇴하면서 김 대표의 입장은 묘해졌다. 경쟁관계인 정 의장이 당무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판에 김 대표가 계획대로 원내대표 자리를 고수하기엔 여러모로 걸림돌이 적지 않기 때문. 당장 당권파에서는 정 의장 사퇴를 전제로 “차기 주자들은 새 지도부에서 전원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할 확률이 높아졌다. “당분간은 섣부른 차기 경쟁보다는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을 힘있게 뒷받침해야 한다”는 논리까지 곁들여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와 관련, 최근 노 대통령 주변에서 김 대표에 원내대표 연임보다는 입각을 권유했다는 얘기가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총선 직후 우리당 내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이 김 대표에게 통일부 장관을 제의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지난 19일 노 대통령과 김 대표의 청와대 단독 만찬에서 노 대통령도 비슷한 취지의 얘기를 했다는 ‘설’(說)도 나온다.
김 대표의 입각설은 이전 정권에서도 나온 바 있다. 2001년 ‘3·26 개각’ 전 김 대표는 공개적으로 입각을 희망했으며, 특히 행정자치부 장관 자리를 맡고 싶다는 의중을 피력한 바 있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행정경험을 쌓고 싶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원내대표 연임을 80%가량 성사시켜 둔 김 대표로서는 이번엔 입각 제의가 그리 반갑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지난 16일 김 위원과의 청와대 단독 오찬에서 “6월5일 부산시장, 경남지사 보궐선거에서 전국정당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로, 사실상 보선 사령탑을 맡아달라 요청하면서 ‘중용설’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전국정당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내보이고, 6·5 보선 필승카드로 김 위원을 총리에 기용할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김 위원과 정 의장의 ‘동시 입각’, 더군다나 김 위원이 총리를 맡는 상황에서 정 의장이 그보다 격이 낮은 자리를 맡으리라 가정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그림이 어색해지는 데다 “대권 주자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여권 내의 일반적인 정서와도 배치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김 위원측에서 우리당 입당 이래 정 의장 주변에서 계속 견제해 왔던 것과 이번 의장직 사퇴 선언을 연관지어 불쾌해 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차기 3인방’이 이처럼 미묘한 알력을 보이면서 관심은 노 대통령의 의중, 이른바 ‘노심’(盧心)으로 모아진다. 일단 여권 핵심부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노 대통령은 차기 주자들간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지만 대권 레이스가 ‘조기 과열화’되는 데는 반대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2000년 4·13 총선 후 노 대통령이 취했던 태도를 지금의 상황에 투영해 보면 ‘노심’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 측근은 “노 대통령은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서 낙선한 후 8월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지 않고 대신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당시 출마 권유도 많았지만 ‘현 정부의 임기가 2년 반이나 남은 시점에서 차기 주자들이 경선에 참여하는 것은 대선 분위기 조기 과열 등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노 대통령은 당시 이같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실상 당을 장악하고 있는 권노갑 전 고문에게 협조요청을 하기까지 했다. 4년이 지나 대통령 자리에 앉은 노 대통령으로선 그때의 생각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노 대통령 측근들은 이전 정권의 예를 들어가며 차기 경쟁이 가시화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집권 1년차에 야당의 발목잡기로 인해 국정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노 대통령이 이제야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맞게 됐는데 차기를 둘러싼 논란으로 여권의 역량이 낭비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여권 주변에서는 정 의장과 김 대표, 김 위원 등 차기 3인방 모두 입각설이 나도는 배경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렇다고 노 대통령이 차기 구도 가시화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여권 한 핵심인사는 “노 대통령은 차기 주자들끼리 자율적으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게 별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공정 경쟁을 위해 대권 후보군에게 기회를 공평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이를 통해 여권 전반에 활력도 제고될 것이란 입장이다. 다만 차기 주자들이 지나치게 각개약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거나 계파간 ‘세 불리기’에 몰두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다”고 밝혔다. 경쟁은 허용하되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방해가 되거나, ‘레임 덕’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아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라 하겠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