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갑옷 입었기에 칼날 막았나
▲ 2004년 ‘대통령측근비리 특검’ 현판식 모습. 당시 이우승 특검보(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수사 방해 의혹을 제기했었다. | ||
하지만 가장 날카로운 ‘검(劍)’을 상징한다는 대검 중수부와 특검도 어쩐 일인지 문 회장에게만은 칼끝을 바로 세우지 못해왔다. 2003년 말 대선자금 수사와 2004년 초 특검의 수사망을 뚫고 그는 조세포탈 혐의만 인정받아 2004년 8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오히려 대검과 특검이 썬앤문 의혹에 면죄부만 부여한 꼴”이라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최근 또 다시 터진 썬앤문 내부 제보자의 잇따른 두 건의 자금 횡령 및 로비 관련 진정서는 중수부와 특검을 골치아프게 만들고 있다. 특히 2년 전 “파견검사가 수사 거부와 방해를 하고 있다”며 썬앤문 관련 수사 특검보직을 전격 사퇴한 이우승 변호사의 당시 항변이 새삼 ‘뜨거운 감자’로 거론되고 있다. 참여정부 초기였던 당시 과연 권력의 입김이 특검에까지 미쳤을까.
2004년 1월 5일. 이날 상징적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김진흥 특검과 세 명의 특검보는 ‘대통령측근비리 특검’ 현판식을 갖고 60일간의 특검수사 일정을 본격 개시했다. 동시에 조순형 민주당 대표는 “노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도 있다”고 탄핵 가능성을 처음 언급했다. 17대 총선을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에서 대통령 탄핵 여론과 대통령측근비리 수사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국민들의 눈과 귀는 온통 특검팀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인 2월 16일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특검의 세 팀 가운데 썬앤문 의혹 수사를 책임졌던 2팀의 팀장 격인 이우승 특검보가 전격 사퇴를 선언한 것. 이 특검보는 “검찰 파견검사가 수사 지시를 거부하고 교묘히 방해해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이에 대해 김광준(현 의정부지검 형사5부장) 당시 파견검사는 “이 특검보가 피의자 조사 과정에서 폭행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수사관들에게 폭력수사를 지시했다”는 또 다른 폭로전으로 맞섰다. 결국 팀장과 부팀장 격인 특검보와 파견검사의 쌍방 폭로전으로 썬앤문 특검 수사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당시 김진흥 특검은 “실체가 없는 것을 무리해서 찾아내려다 보니 생긴 불상사”라며 이 특검보의 폭행 사실을 인정했고, 이 특검보는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것으로 사상 초유의 사태도 일단락됐다.
당시 썬앤문 의혹의 주된 내용은 문 회장 측이 대선 직전 노 대통령 측에 95억 원을 전달했다는 의혹에 대한 진실 여부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 대통령 최측근인 이광재 의원이 얼마나 개입했는지 여부에 대한 수사였다.
특검팀은 당초 95억 원 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으나 막상 그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1월 20일부터 수사 방향을 급격히 농협 불법 대출 의혹으로 틀었다는 것. 이때부터 이 특검보와 김 검사 간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당시 이 특검보는 김 검사에게 “썬앤문의 농협 대출에 의혹이 많은 만큼 관련 계좌추적이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며 “농협 임직원의 계좌추적을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 검사는 “이는 당초의 특검 수사 대상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직원들의 계좌추적을 일일이 다 하는 데에만 엄청난 수사력이 소요될 우려가 있다”는 반대 의견을 내놨다. 이때부터 사실상 2팀 내부에는 두 의견이 정면충돌하면서 자중지란만 초래했다.
▲ 2004년 청문회 증인으로 참석한 문병욱 썬앤문 회장(오른쪽)과 김성래 부회장. 당시 문 회장에 대해 조세포탈 혐의만 인정됐다. | ||
그러나 썬앤문 의혹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내부적으로도 곪아 있었다. 2년 만에 검찰은 다시 썬앤문에 칼을 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문 회장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내부 제보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애당초 검찰의 재수사 의지와는 상관없는 자생적 돌출이었던 셈이다.
현재 구속 중인 김성래 썬앤문 부회장이 지난 5월 검찰에 “노 정권 출범 직전 문 회장 소유 차명 계좌에서 60억 원이 인출됐다”는 내용을 진정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양평TPC 골프장 소유권을 놓고 지난 5년간 썬앤문 그룹과 법정 다툼을 벌였던 S사의 박 아무개 사장도 “썬앤문과 골프장 내부 제보를 통해 골프장 회원권 분양대금과 대출금 등에서 무려 800억 원 이상이 현재 사라진 사실이 발견됐다”며 진정서와 함께 관련 증거 자료를 검찰에 모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 부회장은 “노 대통령 취임 직전에 60억 원이 인출됐고, 이 중 수억 원은 농협 고위 간부에게 뇌물로 전달되고 나머지가 출범을 앞둔 노 정권의 실세에게 건네졌다”고 폭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2년 전 특검 수사를 둘러싸고 이 특검보와 김 검사가 갈등을 벌인 사안이 핵심 쟁점이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이 전 특검보는 19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특검 일은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당시 사퇴서에 모두 썼다. 그 내용 그대로”라고 밝혔다. 2년 전 그가 읽은 사퇴서 전문을 보면 ‘1월 20일경 관련기록 검토를 완료하고 나서 파견 검사에게 농협 임직원의 계좌추적과 수사계획서 작성을 지시하였으나 파견 검사는 “연관성이 없다. 지엽적인 문제다”는 이유로 수사를 거부하였고 수사계획서조차 약 20일이 지난 2월 9일경에서야 형식적으로 제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당시 이 특검보가 농협 임직원의 계좌추적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맥을 제대로 짚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 부회장의 말처럼 농협 임직원에게 로비를 했기 때문에 거액의 불법 대출이 가능했던 것. 그리고 이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남은 금액의 사용처도 밝혀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나마 농협 관계자들을 상대로 진행되던 이런 수사마저 이 특검보가 사퇴한 16일 이후부터는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김 검사는 21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특검의 성격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그는 “특검은 법에 명시된 내용에 한해서만 한정된 시간 안에 조사하게 되어 있다. 당시 썬앤문 의혹은 95억 원 로비의 실체와 이광재 의원 개입 여부였다. 농협 임직원의 계좌를 일일이 추적한다는 것은 수사 대상도 아니었고, 또 개인 인권 침해 소지까지 있었다. 그리고 한정된 시간 안에 그 방대한 양을 다 조사할 수도 없었다”고 수사 반대 입장의 이유를 설명했다.
법조계에서는 김 검사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의견도 많다. 특검의 성격에 보다 충실한 결과라는 것. 그러나 특검 출신의 한 법조인은 “수사 과정에서 범위가 넘어갔다고 해서 의혹의 소지가 있음에도 거기서 멈춰 버린다면 과연 그것을 국민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파견검사의 수사 기피와 수사 방해 의혹이 이제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게 됐다.
김진흥 당시 특검은 인터뷰를 사양했다. 이 전 특검보를 대신해서 수사를 마무리지은 양승천 전 특검보는 해외 체류 중이다. 이래저래 썬앤문 의혹은 기존의 의혹에 또다른 의혹이 덧붙여져서 이제 점점 게이트로 비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