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도전5강’ 아직 살아있네~
백성호 9단
8월 11일 월요일 저녁. 백 9단이 박지연에게 이기자 검토실에서 앞서보다 더 큰 박수가 터졌다. 더구나 이날 바둑은 중반 넘어서면서부터는 엎치락뒤치락 벼랑 끝 패싸움의 연속이었다. 흑을 든 백 9단이 집으로 앞서나가다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박 3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큰 곳을 차지했다. 백 9단 대신 해설하던 이민진 7단이 “분위기가 백에게 넘어온 것 같다”면서 역전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끝내기 과정에서 이번에는 박 3단이 한눈을 팔았고, 그러자 백 9단은 무시무시한 자폭성 패를 결행, 검토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패싸움은 쌍방 초대형 대마의 사활로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이었다. 안팎 200집쯤 되는 대마가 얽혔다. 백 대마의 절반이 먼저 떨어졌다. 박 3단은 흑 대마의 사활을 다시 패로 물고 늘어졌는데, 그 절체절명의 장면에서 백 9단에게는 절대-자체 팻감이 2개 있었고, 박 3단은 그게 없었다. 제한시간 각자 10분, 40초 초읽기 3회의 `초속기전인데, 7시에 시작한 바둑이 9시 반이 넘어서야 끝났다. 이번 지지옥션배 최장시간 기록의 혈전이었다. 검토실에선 “백 9단의 명국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2일, 화요일. 여자 팀에서는 김나현(23) 초단. 김 초단은 이세돌 도장이 배출한 여자프로 1호. 날카롭고 반짝이는 바둑으로 입단할 때부터 “여자 이세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재이니 조만간 뭔가를 보여줄 것으로 사람들은 기대를 접지 않고 있다.
김나현과의 일전은 박지연과의 바둑보다도 훨씬 난해한 난타전이었다. “뭐가 뭔지, 구경하는 사람아 더 머리가 아프다”는 해설장의 멘트가 과장이 아니었다. 결과는 김 초단의 승리. 백 9단은 수세였던 바둑을 종반에 뒤집었고, 그 길로 3연승이 가시권에 들어왔으나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서 분루를 삼켰다.
백 9단에게 검토실의 얘기를 전하자 “3연승을 놓친 것은 좀 아깝지만, 애초에 연승의 욕심은 없었고, 팀을 위해 급한 불을 끈 것으로 만족한다”면서 웃었다.
‘도전5강’이란 말이 있었다. 조훈현-서봉수가 전횡을 일삼던 1980년대, 조-서에게 도전하고 타이틀도 빼앗을 것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며 성원했던 다섯 젊은이를 일컫던 말이었다. 장수영 백성호 서능욱 김수장 강훈이었다. 왕년에 이들은 각자 색깔이 있었다. 장수영은 기복 없는 페이스로 상대를 제압했다. 백성호는 정연하고 깔끔했다. 서능욱은 빠르고 현란했다. 김수장은 태연하면서도 독특했다. 강훈은 치열하고 강인했다.
그래서 올드팬 중에는 “요새 젊은이들이 실력도 세고 두기도 잘 두는데, 시대적으로 바둑 스타일이 바뀌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색깔이나 개성에서는 좀 그렇다. 매력은 오히려 예전의 도전5강 때만 덜한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요즘은 무조건 이기는 바둑만 두고들 있는데, 예전에는 그래도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것도 승부사의 화두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이광구 객원기자
흑 - 백성호 9단 / 백 - 박지연 3단 어마무시한 ‘자폭성 패’ 백성호-박지연의 바둑을 소개한다. 백 9단이 흑. 백 9단이 우하귀에서 움직인 백돌들을 전부 잡아, 이민진 7단의 해설에 따르면 “흑이 일단 포인트를 올린 상황”이다. <1도> 백1은 필요한 보강. 중앙에 있는 백돌들이 엷다고 한다. 세력이 아니라 자칫하면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것. 흑2는 지나가는 길에 선수한다는 생각이었겠으나 이게 한눈을 판 수였고, 백3으로 들을 버리면서 선수를 잡아 상변 5로 달려간 것이 기민했다고 한다. 흑6은 내친걸음? 그러나 백7이 다시 재치 있는 동문서답. 흑은 들을 살리기가 곤란해졌다는 것. “흑2로는 백5 자리에 빠지는 것이 컸으며 그랬으면 흑의 우세가 계속되었다”는 것이 이민진 7단의 해설이었다. 백5 때 흑A로 막고 백B 때 흑C로 잇는 것은 후수. 또 백7 때 흑들이 빠져나올 수는 있지만, 그러면 백이 선수로 상변을 넘게 되니 득보다 실이 많단다. 이래서 역전 무드. <2도> 중앙의 백1. 흑이 응수하지 않으면 잡혀 있는 왼쪽 백돌 서너 점이 살아가니 선수? 이번에는 백 9단이 박 3단의 방심을 놓치지 않았다. 좌하귀 흑4로 먼저 집어넣는 패, 시한폭탄이었다. 험난한 패싸움이 시작되었다. 백이 일단 15로 넘어가며 굴복하고 대신 17로 우상변 흑돌을 잡자 우하귀쪽 흑20의 젖힘, 백이 넘는 것과 비교해 엄청난 끝내기. 좌하귀는 패를 완전히 해소하지 않고, 좌하귀는 계속 패로 버티겠다면서 여길 젖힌 것. 백 9단의 기세가 불꽃을 튀긴 장면이다(흑8, 14는 흑4 자리 패. 백11은 백5 자리 패. 백25는 23 아래 이음. 백27, 33, 39는 흑16의 왼쪽 패. 흑30, 36은 16 자리 패). 그리고 좌하귀 패싸움이 다시 시작되어 백이 우변 흑진을 향해 43으로 팻감을 썼을 때, 백 9단은 받지 않았다. <3도> 백2 때 흑3으로 좌하귀 패를 해소한 것. 백4부터는 박 3단이 상변 흑 대마를 잡으러 가는 장면. 그러나 흑 대마는 흑7-9에서 13으로 끊어 잡아 사는 수가 있었다. 국후 박 3단은 “흑13을 깜빡했다”고 말했다. 백A로 끊어 파호하면? 흑B로 몰고 C에 붙이는 수로 오른쪽 백돌들이 떨어진다. <4도> 백1을 선수하고 3으로, 잡혀있던 돌들을 살렸다. 백, 미세하게나마 우세. 백 9단이 다시 칼을 뽑는다. 흑4-6을 선수하고 8로 젖혀 백 대마 전체를 잡으러 간 것. 국후 백 9단은 “나도 여기서는 백 대마를 무조건 잡은 것으로 착각했다”면서 웃었다. <5도> 백1로 막아 또 패. 흑6 때 받지 않고 백7로 따내 흑 대마는 살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백 9단은 백11의 팻감을 외면하고 12, 대마의 절반을 포획했다. 흑 대마는? 그쪽 패는? 흑14의 팻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3단은 돌을 거두었다(흑10은 자리 패. 백13은 백7 자리 패).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