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석엔 허수아비들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1979년 10월 28일 오후 4시 합동수사본부 전두환 소장의 첫 수사발표가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평소 대통령께 건의하는 정책에 대하여 불신을 받아왔고 자신의 모든 보고와 건의가 차지철 경호실장에 의해서 제동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양인의 감정대립이 격화되어 있었고, 업무집행상의 무능으로 수차례에 걸쳐 대통령에게 힐책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최근 요직개편설에 따라 자신의 인책해임을 우려하고 있던 차에 10월 26일 저녁 박 대통령,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만찬 도중 차 실장과 심한 의견충돌을 한 뒤 밖으로 나와 권총을 찾아 들고 들어가면서 밖에 있던 부하들에게 ‘내가 해치울 테니 총소리가 나면 밖에 있는 경호원들을 해치우라’고 지시한 뒤 7시 35분경 방에 들어가 차 실장과 박 대통령을 쏘았다.”
그로부터 아흐레 뒤인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해 이렇게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은 원흉 김재규가 지난 6월부터 집권을 노려 단독으로 일으킨 범행이며 군이나 CIA의 개입은 전혀 없었다. 이 사건은 그 중대성에 비추어 계엄군법회의의 관할로 한다.”
20일 후인 11월 26일 육군본부 계엄 보통 군법회의 검찰부는 합동수사본부로부터 송치 받은 김재규, 김계원,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 7명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기소했다.
그 무렵 수도군단 사령부에 중위로 근무하던 나는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장군이 타고 오는 헬기가 사령부에 내리는 걸 더러 목격하곤 했었다. 폭풍같이 강한 바람을 내뿜으며 헬기는 하강하고 있었다. 군기 빠진 법무장교였던 나는 가급적 전두환 장군이 지나갈 길은 피해 다녔다. 당시는 붉은 별판이 번쩍거리는 검은 승용차는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었다. 장교 두발규정에 어긋난 긴 머리라도 적발당하면 한밤중에 무기고 보초를 서는 기합을 받기 때문이었다.
법조계의 선배 변호사인 김이조 변호사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었다. 김 변호사가 법무장교 대위로 사령부에 근무할 때였다고 했다. 법무관의 특권을 부려 영관식당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부대 살림을 하는 본부대장이 다가와 소령 이상이 밥을 먹는 식당이니까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법무관이던 김이조 대위는 먹던 식반을 내동댕이치고 쫓겨 나왔다고 했다. 그때 본부대장이 전두환 대위였다고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1979년 말경 나는 수시로 법무감실로 갈 일이 있었다. 업무보고도 하고 계엄사령부의 지시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김재규 재판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나도 틈틈이 군사법정에 들어가 조금씩 들여다보곤 했다. 역사적인 재판을 뇌리에 담아두고 싶었다.
1979년 12월 8일 오후 2시, 육군본부 법무감실 옆에 급조한 계엄군법회의 건물에서 대통령을 살해한 혐의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비공개로 신문을 받고 있었다. 군법회의 법정 안을 17명가량의 헌병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피고인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했죠?”
검찰관이 물었다.
“본인은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아니, 그건 나중에 묻겠습니다. 먼저 살해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검찰관이 김재규의 말을 끊으면서 재촉했다.
“저는 10월 26일 저녁 7시 45분경 민주회복을 위한 국민혁명을 했습니다.”
“육군참모총장을 범행 장소에 유인했던데 범행 후 이용하기 위해서 그랬습니까?”
“저는 그날 오후 4시 40분경 궁정동 만찬장 식당 옆에 있는 저의 2층 집무실에 도착해서 혁명 준비를 했습니다. 독일제 7연발 발터권총을 금고에서 꺼내 시험해 보고 실탄 7발을 장전해서 서가에 올려놨습니다. 그리고 혁명구상을 했습니다. 육군참모총장을 부른 건 유인이 아니라 혁명 초부터 총장과 접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군판사 황 대령이 끼어들었다.
“김재규 피고인은 자꾸만 혁명, 혁명 하는데 혁명인지 아닌지는 재판부에서 판단할 문제니까 사실대로만 말하세요.”
다시 검찰관의 신문이 계속됐다. 대통령과의 만찬 직전에 김재규는 비서실장이던 김계원을 궁정동 안가 잔디밭에서 만났었다.
“김재규 피고인은 사전에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뭐라고 말했죠?”
“오늘 해치워버린다고 했습니다.”
“평상시 어조로 말했나요?”
“약간 강경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김계원 비서실장의 표정은 어땠죠?”
“별 말씀은 없었고 제 느낌에는 긍정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때 비서실장 김계원이 불응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죠?”
“그 자리에서는 농담이라고 하고 넘겼을 겁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은요?”
“뚜렷이 반대했다면 아마 저의 총에 맞았을 겁니다.”
“권총을 바지 라이터 주머니에 넣고 대통령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죠?”
▲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검증에서 김재규 전 중정부장(왼쪽)과 박흥주가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 시해가 ‘민주회복을 위한 국민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 80보도사진연감 | ||
“바지 라이터 주머니에 권총이 들어가나요?”
“저는 담배를 안 피우기 때문에 평소 그 주머니를 크게 만들어 언제든지 권총이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총은 언제 발사했나요?”
“대통령과 얘기를 하다가 쐈습니다.”
“어떤 얘기를 했죠?”
“각하께서 ‘김영삼 총재를 구속해서 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 수석이 말려서 안했더니만 역시 좋지 않아’라고 말해서, 제가 ‘김영삼 총재는 이미 국회에서 제적됐습니다. 또 사법조치까지 하시면 이중으로 처벌하는 게 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곧이어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하면서 바로 총으로 손을 옮겼습니다.”
재판관석에는 김영선 육군중장, 유범상 육군 소장, 오철 육군소장, 황종태 대령이 앉아 있었다. 군법회의 도중 계속 재판관석 뒤쪽 문으로 누군가가 슬며시 들어와 쪽지를 황 대령에게 전달하고 나갔다. 아는 얼굴이었다.
재판 후 군사법정 주변에서 나는 법무감실에 근무하는 박 준위를 우연히 만났다. 그가 슬며시 한마디 했다.
“무슨 놈의 재판이 내가 쥐구멍 드나들 듯 쪽지를 전달해야 하는 건지 몰라. 재판석 위에 있는 저 사람들 다 허수아비야. 재판을 지휘하는 분들은 따로 있어.”
육군본부 법무감실 옆의 작은 방에서는 군법회의 광경이 전부 모니터되고 있었다. 장교동기생인 윤 중위가 있는 방으로 잠시 가봤다.
“역사적인 재판을 하는데 재미있는 일 없었어?”
내가 물었다.
“궁정동 박 대통령 시해 현장을 가는데 차에 자리가 부족하다고 나는 빠지라는 거야, 얌체같이 성 중위만 거기 따라갔어.”
성 중위도 법무관 동기생이었다. 계엄사령부 검찰부에 배속되는 바람에 궁정동의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윤 중위가 계속했다.
“어제 말이야, 검찰부 저 옆방에 한가닥하게 생긴 놈들이 와서 벌벌 떨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희들 뭐하는 놈이야’ 하고 지나가면서 물어보니까 전부 다 중앙정보부 국장들이라고 그래. 보안사령부에서 중앙정보부로 가서 끌어다 조사하고 계엄사령부 검찰부로 넘긴 거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살아왔던 우리들에게 중앙정보부는 무소불위의 기관이고 신비한 곳이었다. 그런 곳의 간부들이 그런 모습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여기 육군본부에서 법무관으로 근무하면 좋겠다. 이 역사적인 순간의 커다란 사건들을 직접 보고 처리하니까 말이야.”
내가 부러운 듯 동기생 윤 중위에게 말했다.
“아니야, 합수부에서 계엄사령관한테 공문을 올려서 법원이나 검찰에서 엘리트 출신들을 파견받기로 했어. 그러니까 그 파견 나온 사람들이 실질적 재판 진행을 지휘하고, 지금 군사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허수아비로 그냥 진행만 하는 거지.”
당시 크고 작은 지시들이 쪽지로 전달되는 상황이었다. 변호사들은 연기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걸 기각하느냐 받아들이느냐를 모두 실세들이 뒤에서 쪽지로 명령을 내렸다.
그 모니터의 자료들은 비밀에 부쳐졌다가 후에 외부에 유출되어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진술 전 녹음 최초정리>라는 책으로 발표되기도 했다고 한다. 법무감실의 실무자들 중에는 외형상으로는 폐기한 것으로 서류를 만들고 계속 녹음테이프나 서류들을 보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서의 최후진술 부분도 그 일례였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4회 공판부터 사선변호인들의 참석을 거부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항소심에서 비서실장이던 김계원만 무기징역이 되고 나머지 관련자는 모두 사형이었다.
사건 발생 후 208일 만인 1980년 5월 20일 오전 10시, 서소문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최종 판결이 선고되고 있었다. 원래 대법원 형사 3부의 유태흥 대법관이 주심이었던 김재규 사건이 전원합의체로 넘겨져 이영섭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주재황, 양병호, 임환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 김용철, 유태흥, 정태원, 서윤홍 등 대법원판사 10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영섭 대법원장이 주문을 낭독했다.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판결이 확정된 김재규는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집행이 있고 며칠 후 우연히 그 집행장에 들어갔던 법무장교를 만나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김재규 사형집행에 법무장교가 참여해야 하는데 서로들 들어가기 싫어하다가 어쩔 수 없이 내가 가게 됐어. 그런 거 보는 거 영 기분 좋지 않던데.”
선배장교가 술을 한 잔 마시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땠는데요?”
내가 물었다.
“김재규가 염주를 손에 들고 염불을 하다가 집행이 시작되려고 하자 무릎을 꿇고 마지막 기도를 하는데 이미 정신이 다 빠져버린 것 같아. 염주 든 손이 와들와들 떨리더라고. 권력이 뭐고 인생이 뭔지 말이야, 나 참.”
김재규의 사형을 확정한 대법원 판결문은 그간 판례집에 실리지 않다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비로소 그 판결이 공개됐다. 당시 내란목적 살인죄에 대해 다른 소수의견을 피력한 5명의 대법관은 모두 사직했다. 그리고 그 뒤 25년이 흐른 후 나는 당시 책임자들을 만나 얘기를 듣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