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청부까지…한인사회 ‘공포특급’
현재 폭력조직의 진출이 가장 활발한 나라는 바로 필리핀이다. 한국과 불과 네 시간 거리인 데다 물가가 싸고 일부 공직사회의 부패와 반정부 게릴라 등의 활동으로 치안이 허술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서울경찰청 형사과는 지난 9월 25일 경기 의정부지역 폭력배 ‘연합 세븐파’의 조직원들을 무더기로 검거했는데 이 조직도 필리핀으로 진출해 세력 확장을 도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필리핀 현지에서 호텔과 식당 등을 인수한 뒤 조직원들의 도피처로 활용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국내 폭력조직들이 수년 전부터 필리핀으로 무대를 옮겨 현지에서 각종 이권사업을 벌이는 등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필리핀 사정에 정통한 몇몇 소식통을 통해 현지의 실상을 밀착 취재해 보았다.
‘필리핀에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될 경계대상 1호는 한국 사람’이라는 말은 현지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정설처럼 굳어진 이야기다. 그만큼 필리핀 내에서 한국인들의 불법행위가 만연해 있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사기나 절도행각 등 비교적 가벼운 범법행위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청부살인, 악덕사채, 폭력을 동반한 재산 갈취 등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서 현지 한인들을 상대로 각별한 주의를 요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년 전부터 필리핀에서 유학센터를 운영해오다 최근 귀국해 한국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는 김 아무개 씨(41)의 얘기다.
자신을 영어식 이름 ‘리처드’라고 소개한 또 다른 교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95~96년부터 한국의 조직폭력배들이 이곳에 조금씩 흘러들어온 것 같다”며 “지금은 필리핀 곳곳에 한국깡패들이 없는 곳이 없다. 여기에 있는 한국식 가라오케, 한국식당, 사설 도박장, 노래방 등 상당수 업소들을 깡패들이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특히 카지노와 사설 도박장의 폐해가 심각하다. 현지 교민은 물론 관광객, 심지어 유학생까지 도박에 빠져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리처드 씨는 “필리핀으로 진출하는 조폭들은 대부분 이곳에 음성 도박장을 개설한다. 경찰이 단속을 할 법도 하지만 이런 도박장을 이용하는 고객 중 경찰간부가 있는 형편이니 무슨 할 말이 있겠나”라며 “조폭들은 일부 경찰을 매수해 도박장과 함께 사채를 굴리면서 돈을 벌고 있다. 사설 도박장의 주 고객은 중국 화교들과 한국인들이다”고 전했다.
그는 또 “이런 도박장에서 돈 잃고 사채를 잘못 끌어 써서 패가망신하는 것이야 이젠 너무 흔한 얘기고 진짜 심각한 문제는 도박장을 운영하는 한국 조폭들 간의 살육전”이라고 충격적인 실태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직들 간에 이권을 둘러싸고 칼부림을 벌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청부 폭력과 청부 살인도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조폭들의 폐해가 폭력조직들 간의 다툼 정도로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교민 상인이나 사업가들과 같은 선량한 사람들을 상대로 협박을 통해 돈을 갈취하거나 청부 폭력·살인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정황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필리핀 교민사이트에는 상인들뿐 아니라 교회 목사까지도 폭력배들에게 구타당하고 정기적으로 금전상납을 강요받았다는 내용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현지의 일부 경찰은 이미 돈에 매수된 상태기 때문에 신고가 들어와도 뒷짐만 지고 구경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기자는 모 포털 사이트의 필리핀 교민 커뮤니티를 통해 또 다른 필리핀 교민과 접촉할 수 있었다. 아이디가 ‘halohalo’인 이 교민은 “원정 조직폭력배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온 이야기다. 이제 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며 “필리핀 곳곳에 한국 조폭들이 업소를 영업하거나 손길을 뻗치지 않은 곳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실상을 전했다.
그는 해마다 필리핀에서 실종되는 한인들의 수가 늘고 있으며 백주 대낮에 대로변에서 총기에 난사당해 죽는 사건도 있었다고 전했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관계자에게 문의해본 결과 실제로 지난 2002년 필리핀 마닐라 근교 고속도로에서 차를 타고 가던 한인 3명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과 도로 한가운데서 총격전을 벌이다 모두 사망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괴한들은 모두 달아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고 대사관 관계자는 전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한인사회에는 많은 소문들이 나돌았는데 그중에도 청부살인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사망한 이들은 필리핀에서 식당과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사람들로 폭력조직인 ○○파와 관계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에게 총격을 가한 이들은 그 라이벌 조직인 △△파가 살인을 청부한 청부업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교민들의 추측이다.
이런 청부살인사건은 다음해인 2003년 12월에도 발생했다. 필리핀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세부섬에서 한국인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현지 경찰 당국은 이 사건 역시 강도살인이 아니라 청부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정확한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현지 경찰이나 교민들은 모두 한국 폭력조직 간의 이권다툼 때문에 빚어진 일로 보고 있다.
교민 ‘halohalo’는 “이곳에서 발생하는 사건 대부분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는다. 최근에도 교민 사업가가 청부폭력을 당했다거나 누가 실종됐다는 소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며 “하지만 이곳 치안은 매우 허술할 뿐 아니라 필리핀이라는 나라 자체가 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보니 범죄를 저지르고 어느 외딴 섬으로 도망쳐버리면 절대 못 잡는다. 때문에 청부살인의 경우 본인들이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현지 교민들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살인청부는 우리나라 돈으로 단돈 20여만 원이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6년간 유학생활을 한 백 아무개 씨(36)는 “필리핀은 현재 민다나오 섬의 대규모 반정부 게릴라와 내전 중이며, 이 게릴라들은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부살인을 한다”며 “이들은 실전을 경험한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사람을 정말 소리 소문 없이 죽인다. 이렇게 당해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고 실태를 성토했다.
현재 필리핀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수는 무려 10만여 명에 달하고 있으며 해마다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타국에서 땀 흘리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많은 교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시급한 대책마련이 절실하다.
윤지환 프리랜서tangohu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