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중간평가 공약 득보다 실 많아 내가 말렸다
▲ 87년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여의도 유세 현장. 이날 노 후보는 국민의 평가에 따라서는 대통령직 사퇴를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기상천외한 ‘중간평가’ 공약을 내놓았지만 89년 야권의 중간평가 요구를 끝내 회피했다. | ||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네 명의 전직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며 격동의 세월을 보냈던 남 전 장관은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현대사의 뒤안길을 잔잔히 되짚어주고 있다. 책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봤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난 87년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을 당시 당 정책위원장이었던 남 전 장관이 노 후보의 ‘캐치프레이즈’였던 ‘보통사람’이라는 표현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비사가 먼저 눈에 띈다.
당시 노 후보의 측근 참모를 맡은 김학준 박사(현 동아일보 대표이사)가 연설 초안을 갖고 남 전 장관을 찾아왔는데 그 글에 화끈한 주제가 없어 고민 끝에 ‘위대한 평민의 시대’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것이 후에 대박을 터트렸다고. 김 박사가 그 문구 중 ‘평민’을 ‘보통사람’으로 바꾸면서 노 후보가 큰 효과를 봤다고 전했다.
남 전 장관은 지난 80년 일어난 ‘광주 사태’의 명칭을 노 대통령 당선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인 장덕진 전 공화당 의원과 저녁을 먹다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꿔 노 당선자에게 건의한 후일담도 소개했다. 남 전 장관은 당시 대통령이 바뀐다는 것은 시대가 변하는 것이라는 판단 아래 광주 시민의 입장을 반영한 표현을 선택했다고 회고했다.
남 전 장관은 대통령에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이 재임 2년 후 공약으로 약속한 중간평가 실행을 ‘피로스의 승리’(그리스 피로스왕이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는 거두었으나 군대의 사상자가 많아 승리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고사로 대가를 너무나 크게 지불하는 승리를 비유)라는 고사를 강조하며 무산시킨 일, 90년 3당 합당 후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절친하게 지냈던 이종찬 전 의원과 박태준 당시 최고위원(현 포스코 비상임고문)을 지지하지 않고 김영삼 후보를 민정계로서는 처음 지지했던 일화도 소상히 털어놓았다.
13대 국회의원 공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씨와의 사이에 있었던 아슬아슬한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당시 남 전 장관의 지역구인 강서구에 권력실세로 군림하던 전 씨가 출마한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 발단. 남 전 장관은 전 씨 공천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우선 공식적으로는 “대통령 동생이 9땡이면 나는 1땡쯤밖에 안 되니 맞서면 안 된다”며 한 발 물러났다고 한다.
반면 그 무렵 경남 합천에서도 전 씨가 출마한다는 소문이 났는데 그 지역 의원인 유상호 의원은 자신과는 다르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결국 전 씨가 직접 남 전 장관에게 미안하다는 전화를 하며 사태는 진화됐으나 소문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유 의원은 특별한 이유 없이 다음 공천에서 배제됐다고.
남 전 장관은 노동부 장관 재직 당시 민주노총 준비위원장으로 불법 집회를 주도하고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 수배를 받던 친구 권영길 현 민노당 의원을 몰래 만나기로 했다가 ‘법무부는 체포하려 하고 노동부는 은밀히 만나고…’라는 의혹을 받을까봐 대신 주무 과장을 보냈던 또 하나의 아슬아슬한 에피소드를 덧붙였다.
▲ 남재희 전 장관과 이번에 발간한 책 <아주 특별한 정치 비망록>. | ||
당시 전 대통령은 보고를 하러온 남 전 장관에게 “헌법위원회와 헌법재판소 중 어느 게 좋은가”라고 의견을 물었고 이에 그는 “헌법학자들이 헌법재판소를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결국 전 대통령이 곧바로 “그렇게 해”라고 승낙해 현재처럼 막강한 위치에 올라선 헌법재판소가 탄생하게 됐다는 것.
남 전 장관은 “미국에서는 대법원이 위헌 여부를 판결하고 있으므로 미국의 사례를 많이 참고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자칫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면서 ‘(당시) 전 대통령이 미국은 어떤가라고 물었다면…’이라는 말로 역사의 ‘우연성’을 떠올렸다.
남 전 장관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들도 꺼내놓았다. 남 전 장관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은 것은 박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대통령의 친인척 등용을 강하게 문제 삼았던 아찔했던 순간.
당시는 박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처남인 육인수 전 의원, 처조카사위인 장덕진 전 농수산부 장관, 첫째부인의 사위인 한병기 전 의원, 그리고 김 총재의 친형인 김종익 전 의원 등 박 전 대통령 가족 5명이 공화당 의원으로 몸담고 있던 시절.
남 전 장관은 “당시 박 대통령은 내 말에 불쾌한 듯 언성을 높였지만 그 말을 단단히 기억한 듯 단계적으로 시정했다”며 “9대 국회에서 한 씨와 장 씨가 빠져 나갔고, 10대에서는 김(종익)씨가 빠져 나가 결국 김(종필) 의원과 육 의원만 남았다”고 회고했다.
남 전 장관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전횡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 한 토막도 전했다.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원, 박준규 공화당 의장과 함께 의원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남 전 장관은 당시 김 의원의 말을 듣고 차 실장의 ‘장악력’을 재차 확인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김 의원은 “박 의장이 박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로 들어가면 차 실장은 먼저 자기 방에 들렀다 가라면서 ‘내가 각하에게 말씀 드렸으니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고. 차 실장은 박 의장이 어떤 안건을 갖고 왔는지 미리 눈치 채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남 전 장관은 10·26 당시 동교동계 김상현 전 민주당 의원과 있었던 비화도 공개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 빈소의 당번을 맡고 있을 때 김 의원이 찾아와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연금 조치를 풀어 문상을 올 수 있도록 계엄 당국에 건의해 달라고 요청했었다고. 그러나 결국 김 총재의 연금은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