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지난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은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생도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헌법재판소의 최종심판을 기다리는 노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집권2기를 향한 워밍업을 하고 있다. | ||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은 조만간 청와대 비서실의 기능을 대폭 손질하는 등 집권 2기 비서실 진용을 대폭 개편할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전 민정수석 등을 비롯한 집권 원년의 개혁적 인사 재기용도 점쳐진다.
다만 개혁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철저히 국회의 손을 빌린다는 구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즉 ‘국회가 개혁을 주도하고 청와대가 이를 지원한다’는 게 집권 2기를 맞는 노 대통령의 개혁 구상의 중심 컨셉트다. 하지만 ‘국회 주도-청와대 지원’ 개혁 구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 대통령의 개혁 주도권을 필연적으로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청와대가 궁극적으로 구상하는 개혁 과제는 언론개혁·사법개혁·정치개혁”이라면서 “우선 순위가 바뀔 수 있겠지만 이들 3대 개혁 과제를 숙명적으로 안고 가야 한다는 비장한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경제개혁은 체감경기가 워낙 바닥인 점, 기업들의 기(氣) 꺾기와 투자의욕 감퇴, 해외의 시각, 당과 정부 등 여권 내부의 컨센서스(동의) 미확보 등 제반사항을 고려해 ‘민생+개혁’의 ‘투 트랙(two track)론’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언론개혁. 이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지난해 초 당선 직후 이미 ‘인사개혁이 1순위이고, 그 다음 곧바로 언론개혁을 해야 한다’고 한 일이 있다”면서 “궁극적으로는 한국 정치에서 언론을 빼면 얘기가 되지 않고 현재의 언론은 개혁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게 지도부의 뇌리에 박힌 인식”이라고 강한 톤으로 말했다.
집권 열린우리당 내에서 언론개혁프로그램을 관장하는 다른 관계자도 “언론의 자유는 언론 집단의 자유가 아니라 언론을 합리적으로 택할 수 있는 국민의 자유”라면서 “기자 집단 내 양심의 자유를 짓밟으면 언론의 자유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언론을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소모적이고 비합리적 과잉경쟁 구조, 극히 일부 언론의 횡포와 전횡을 방치하는 독점구조, 기자 개개인의 인격권과 언론 자유를 짓밟는 편집권 침해의 소유구조 등을 혁파해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우리 사회는 재벌과 언론족벌, 대학족벌 등 사주 패밀리가 지배하는 사회”라면서 “언론족벌은 자유민주주의의 공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면에서 ‘소유지분 제한’ ‘편집제작위원회’ ‘공동배달제’ 등 3대 아이템을 언론개혁의 핵심으로 삼고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여권은 이를 위해 5월 중 여야와 학계·언론계·시민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언론개혁국민협의회를 구성한 뒤 국회 내에 언론발전특위를 만들어 본격적인 언론개혁의 수순을 밟을 예정이다.
다음은 정치(국회)개혁이다. 투명한 정치자금 통로 구축, 밑으로부터의 참여구조 등 정치개혁의 기본작업은 16대 국회 말 어느 정도 토대를 닦았다는 판단에서 다음 단계로 국회 내에서 일하는 국회의원, 공부하는 국회의원을 만든다는 것을 기본개념으로 삼고 있다. ‘상임위의 분리 통합문제’, ‘대정부질의제 개선’, ‘국정감사제도 개선’ 등이 이에 속한다.
상임위 분리 통합과 관련, 환경노동위, 법제사법위, 운영위원회와 정무위원회의 소관업무를 뜯어고칠 태세다. 현재 17개인 상임위를 25개 안팎으로 늘리는 것도 검토된다는 후문이다. 대정부 질의는 처음부터 의원이 장황하게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기초질문서를 장관에게 사전에 보내 답변을 받고 그 답변에 대해서 본회의 현장에서 보충 질의를 하는 것 등을 검토중이다.
국정감사제도의 개선은 현재 정기국회 때만 하는 것을 기간을 늘리거나 정기국회가 아닐 때도 하자는 내용으로 압축된다. 국정감사가 예산 결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고 행정부가 예산을 집행하는 9~10월에 할 수밖에 없다는 반론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간을 늘려 잡아서 집중적으로 분산시키자는 의견들이다. 그밖에 상시개원제, 입법조사처 신설, 의원평가 제도 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다음 단계가 사법개혁이다. 여권 관계자들은 “올해 정기국회 내에 필요한 입법을 완료하는 게 목표”라고 밝히고 있다. 청와대는 정치권이 그 틀을 만들면 법조계 인사 등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가장 필요한 틀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여권은 특히 한나라당의 대표 브레인인 박세일 국회의원 당선자가 과거 김영삼 정권 정책기획수석 시절 사법개혁에 대한 강한 의욕과 구상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법개혁의 실현 가능성에 상당한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이 같은 개혁과제를 실천에 옮기는 구상은 국회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집권여당이 새로운 개혁적 지도부를 구성하고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 등 실세들을 내각에 기용해 안팎의 환경이 마련된다면, 국회를 통한 이런 개혁구상은 더욱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노 대통령과 청와대의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국정운영 구상에 따르면 청와대는 개혁의 중심이라기보다는 강력한 후견인의 기능을 하는 곳이다. 집권 2기 노 대통령의 새 비서실 진용 구축의 밑그림도 이런 전제로 그려진다.
요컨대 노 대통령은 당·정 분리를 명분으로 오랫동안 국회 및 정치권을 담당해 온 정무수석을 폐지하는 대신 사회정책수석실과 시민사회수석실을 신설할 계획이다. 사회정책수석의 역할은 사회분야에 대한 총괄 조정 및 기획이다. 시민사회수석엔 문재인 전 민정수석이 유력한 인물로 떠오른다. 이 같은 양대 사회 관련 수석실 신설은 정부부처에서의 사회부총리제 신설을 필연적으로 예고하는 성격이 있다.
하지만 ‘국회 주도의 개혁 및 청와대 지원 시스템 구축’이라는 이 같은 구상이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권 수렴청정’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특히 정무수석실 폐지론이 기정사실화하는 상황에서 국회 주도의 개혁은 곧 노 대통령에게 당과 내각을 직접 관리하는 ‘친정체제’로의 길을 재촉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지적도 제기된다. 권력의 속성상 당이나 내각의 자율성에 본질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이런 마당에 정무수석실을 폐지한다는 것은 결국 개혁작업의 최종 조율사를 노무현 대통령으로 삼겠다는 것의 ‘빛 좋은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