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은 없다… 참회록이라면 모를까”
▲ 지난 10월 23일 전두환 씨가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고 최규하 전 대통령 빈소에 분양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최 전 대통령의 비망록이 한국 정치의 주요 이슈로 부각된 것은 1995년부터였다. 당시 검찰은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일환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법원에서도 그를 증인으로 출석시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최 전 대통령 측은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수행한 국정행위를 일일이 소명하는 것은 국익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국민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최 전 대통령의 침묵으로 12·12와 5·18에 대한 명확한 규명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최 전 대통령의 무거운 입을 대신할 글이 그의 서교동 자택에서 준비될 것이란 일말의 기대감만 남겨 놓았다.
2004년 11월 12일 대법원은 ‘12·12 및 5·18 관련 수사 자료 일부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청구인이었던 정동년 전 광주민주항쟁연합 상임의장의 도움으로 검찰수사 기록들을 입수한 기자는 최규하 전 대통령 측근들 및 관계자들의 진술조서에서 비교적 상세한 상황이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직접 당사자인 최 전 대통령이 이를 확인하지 않으면 크게 의미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기자가 최 전 대통령의 의전비서관 출신인 신두순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월 성남의 그의 자택에서였다. 당시 신 씨는 “최 전 대통령께서 평소에 메모해 놓은 자료는 있다. 다만 회고록 계획은 지금 없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지금 알 수 없다”며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최 전 대통령이 관련 내용에 대해서 측근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그런 가운데 최 전 대통령이 지난 10월 22일 갑자기 별세하면서 그가 비망록을 남겼는지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유족 및 측근들의 언급은 상당히 모호했다. 장남 최윤홍 씨는 “선친께서 일기를 쓰셨는지는 알 수 없다. 쓰셨을 가능성은 있다”고 밝혔다. 최흥순 비서실장도 “아직 서재를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망록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와 다시 만난 신 씨는 비교적 명확하게 비망록의 실체를 인정했다. 10월 25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나눈 신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최 전 대통령의 비망록에 대해서 여전히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실제 존재하는 것이 맞나.
▲자료는 다 있다.
―그 내용을 직접 봤나. 어떤 형식의 자료인가.
▲기자는 일기 안 쓰나? 우리는 다 일기 쓰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인가.
▲서교동 자택 서재의 서랍 속에 다 있을 것이다.
―언제 공개할 것인가.
▲내용을 공개할 수 있다 없다는 아직 결정할 순 없지만 그래도….
―고인께서 생전에 이와 관련해 어떤 입장을 밝힌 바가 없나. 혹시 유언이라도.
▲워낙 갑자기 돌아가셔서 유언도 없었다.
―가장 최근에 고인을 뵌 게 언제인가.
▲지난 추석 때 인사드렸다. 그때만 해도 기력은 많이 쇠했지만 그래도 내년 봄까지는 갈 거라 여겼다.
―그럼 고인의 뜻을 어떻게 헤아리나.
▲유족들과 비서 출신인 우리들이 서로 의논해서 결정할 것이다. 일단 장례부터 모시고 나서 정리를 해도 해야…. (자료는) 지금 그대로 다 있으니까, 자택에 (자료를) 다 정리를 해야겠지.
―자료란 공식적인 기록인가. 아니면 비공식적인 개인기록인가.
▲공식기록이야 의전비서관이었던 내가 쓰는 것이고. 그것은 뭐 업무일지 같은 것이다. 그것 말고 고인께서 매일매일 생활의 기록을 쓰시니까.
▲ 고 최규하 전 대통령의 운구행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전 전 대통령은 설날에도 세배 오셨다. 퇴임 후 백담사 다녀와서는 매년 인사 오고 그랬다. 노 전 대통령은 안 왔다. 뭐, 그분들과 특별히 사이가 나쁠 것이야 없다. 민정기 비서관 등 우리 비서관 출신끼리도 서로 왔다갔다하며 친했으니까.
―회고록 준비 계획은 없었나.
▲회고록은 계획에 아예 없었다. 쓰시면 참회록을 쓰는 거지 회고록은 가당치도 않다.
―참회록이라는 것은 고인의 표현인가.
▲내가 말씀을 드렸다.
―인정하셨나. 회고록과 참회록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른데.
▲인정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나. 인생을 살다보면 참회할 것이 많으니까 다 참회록이라는 뜻이지.
비망록의 실체에 대해 인정했지만 그래도 신 씨의 답변은 여전히 시종 조심스러웠다. 일각에서는 유족들과 측근들의 이런 조심스런 태도로 미뤄볼 때 비망록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기 어렵다는 비관적 전망이 벌써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최 전 대통령의 생전 의중이 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장남 윤홍 씨 역시 부친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서 상당히 신중하고 꼼꼼하다. 고인이 명확한 유언을 남겼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것으로 봐서 설사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해도 다 공개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망록의 실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썼던 내용이 그대로 보관된 것인지, 이후 최 전 대통령이 이를 재정리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 하지만 최 전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당시의 메모 내용을 토대로 재정리했을 것이란 의견이 우세하다.
실제 장례식장에서는 검찰 수사 파동 이후 최 전 대통령이 본격적인 기록 정리를 시도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다만 생전 공개보다는 사후 공개를 원칙으로 했을 것이란 얘기다.
이 같은 전망은 검찰 수사 당시에도 측근들을 통해 언급됐다. 법률 대리인 격이었던 이기창 변호사는 “회고록 집필이 아니라 다만 재임 중 작성하셨던 각종 메모 등 비망록을 정리하는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측근은 “한때 비망록의 정리된 내용의 출간을 검토한 바도 있지만 적절치 않다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정리된 비망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무엇보다 최대의 관심은 5·18 당시 광주에서 최초 발포명령 허가를 누가 내렸는지에 대한 정답이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다. 또 12·12 당시 신군부의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 과정의 미스터리도 풀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검찰이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체포재가서’를 찾지 못하자 항간에는 최 전 대통령이 서명했다는 정 사령관 체포재가서 자체가 없었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80년 8월 15일 전격적으로 하야 성명을 발표한 과정도 의혹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임 재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과정 등에서 신군부의 강압이 있었는지 여부도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최 전 대통령의 기록도 명확한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 변호사는 지난 96년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에 속아서 정권을 내줬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추정하는 것처럼 최 전 대통령이 신군부의 강압에 일방적으로 당했던 것이 아니라 서로 합의에 의해서 물러난 것이라면 최 전 대통령도 떳떳한 입장만은 아닐 것”이라는 얘기도 그래서 설득력 있게 다가선다.
“고인은 여느 정치꾼들처럼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꾸미지 못하시는 성품”이라는 한 측근의 말처럼 최 전 대통령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냥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88년 청문회 때나 95~96년 검찰 수사 때 최 전 대통령은 여론의 등에 밀려 나가서 증언을 할 뜻을 비치기도 했지만 측근에서 강력하게 만류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최 대통령 재임시절 국무총리를 지냈던 신현확 씨는 “95년 12월 15일 아침에 최 (전) 대통령께서 내게 전화를 해서 검찰 조사에 응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상의하기에 검찰 조사에 응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한 바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수사 담당자였던 김상희 부장검사 또한 “서교동 자택에서 최 전 대통령을 만났더니 의외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중요한 말이 나오려는 순간마다 곁에 동석했던 이 변호사 등 측근들이 말을 막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신 씨가 기자에게 밝힌 ‘참회록’이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