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셋 중 하나만 산다’ 지난 17일 의장직 사퇴 기자회견을 하는 정동영 전 의장(가운데). 신기남 의원(오른쪽)이 의장직을 물려받았고 천정배 의원은 원내대표직을 맡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들 3인방은 지난 2000년 민주당 최고위원 선거 이후부터 촉발된 당 쇄신 과정에서 동교동 구파에 맞선 것을 시작으로 정치 행보를 함께해 왔다. 2001년 5월 민주당 정풍운동 당시 이들 세 사람은 여의도 모처에서 모임을 갖고 “정치를 해도 함께하고 그만둘 때도 함께 그만두자”는 결의를 했다.
이들의 ‘찰떡 호흡’은 지난 대선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로 이어졌으며 지난해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요 동인이 됐다. 정 전 의장이 당의장으로서 일찌감치 차기 대권 후보군으로 올라 이들 세 사람의 라이벌 의식을 우려한 시각도 나왔지만 이들은 ‘우리의 협력관계는 건강하다’는 말로 일축해오곤 했다.
그러나 이들의 긴밀한 관계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정가에서는 물론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는 시각이 늘어가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천·신·정 세 사람 모두 행정부와 당내 요직을 사실상 차지하게 된 셈이다. 명실상부한 대권 후보군이 된 것이다. 대선을 향한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들 세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길 것으로 예측하는 인사들은 이번 당의장 승계 과정에서 나온 ‘잡음’을 그 근거로 든다. 열린우리당 당헌상 당의장이 물러날 경우 당의장 선거 2위 득표자였던 신기남 의원이 당의장을 승계하게 돼 있다. 그러나 지난 16일 정 전 의장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당내 일각에선 “조기 전당대회를 열어 당 지도부를 새로 선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천정배 원내대표도 “정 의장이 사퇴할 경우 새롭게 전당대회를 개최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란 뜻을 밝힌 바 있고, 정 전 의장의 한 측근 인사도 “7월께 당 분위기 쇄신을 위해 전당대회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투표인단 구성 같은 현실적인 면에서 어렵지 않겠나”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후 17일 정 전 의장이 사퇴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국회의원 재·보선 직전인 내년 1월께가 전당대회 시점으로 적당하다’는 당내 공감대가 형성되긴 했지만 신 의원의 당의장 승계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 기류가 ‘천·신·정’ 내부에서도 일시적으로나마 흘렀던 셈이다.
이에 대해 신 의원측은 “현실적으로 조기 전당대회 개최에는 현 당 지도부 전원사퇴와 투표에 필요한 진성당원 확보 같은 과정이 필요한데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2기를 보좌하는데 전력 투구해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신 의원측은 “(신 의원이) 6개월에서 1년 정도 당의장직을 수행한 뒤 당 체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면 그 때 가서 전당대회를 해도 늦지 않다”고 덧붙였다.
정 전 의장 사퇴가 ‘신기남 의원의 당의장직 승계’로 일단락됐지만 정가에선 향후 치열한 당 주도권 다툼이 벌어질 것으로 예측하는 시각도 나온다.
정 전 의장은 지난 1일 당 기획조정위원장에 김한길, 조직위원장에 이종걸, 윤리위원장에 정동채, 전자정당위원장에 송영길, 예결위원장에 홍재형 당선자를 내정하는 등 측근과 재선의원 중심으로 당 요직 인선을 했다. 지난 16일 정 전 의장의 사퇴 결심이 알려지자 당내 일각에선 ‘사퇴를 목전에 둔 정동영 전 의장이 당직 인선을 한 배경이 뭐냐. 자신의 우호 세력을 미리 당 요직에 배치해두려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 전 의장이 당의장 사퇴 이후에도 여전히 당 지도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란 게 이들의 시각이다.
17일 사퇴 기자회견에서 정 전 의장은 “오늘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서 “선거전에서 저의 허물이 본의 아니게 많은 분들께 아픔을 드린 점에 대해 참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겸허하게 반성한다”며 겸손한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정동영 직계’ 인사들이 당 지도부에 포진해 정 전 의장의 입김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할 것이란 관측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김 당선자측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고 신 의원의 측근인사도 “정 전 의장과 신 의원, 김 당선자는 서로 말을 편하게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데…”라며 일각의 확대해석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내 한 재선의원은 “김 당선자가 정 전 의장 의중을 반영하는 ‘정동영계’ 인사라는 데 당내 이견이 없을 정도”라며 “향후 김 당선자의 역할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천정배 원내대표의 행보도 ‘천·신·정’ 결속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천 대표는 원내대표 당선 직후 “우리당이 국민여론을 좀더 듣고 정책역량을 길러 정부와 대등한 관계, 그 이상으로 정부를 이끌어갈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당 우위 역할론’을 강조했다. 천 대표와 가까운 한 당내 인사는 “천 대표가 밝힌 당 우위 역할론은 우리당이 원내정책정당화를 표방하는 만큼 ‘원내대표 역할론’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천 대표는 노 대통령 최측근인 이광재씨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던 인물”이라며 “원내대표실 위상이 한층 강화된 마당에 (천 대표가) 새 당의장(신기남 의원)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천 대표는 지난해 10월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었던 이광재 당선자에 대해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실세”라고 비판해 이 당선자가 청와대를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 일각에서는 원내대표 선거 운동 때부터 ‘보다 센 개혁 드라이브’를 천명해온 천 대표가 “민생개혁이 우선”이라며 ‘속도조절론’을 설파해온 정 의장 지지 세력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위상이 강화된 천 대표의 향후 스탠스에 따라서 ‘천·신·정’ 사이에 미묘한 입장 차이가 노출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불과 3년여 전 새 정치를 위해 ‘도원결의’를 했던 ‘천·신·정’은 현재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 입각이 확실시되는 정 의장은 이미 김근태 의원과 더불어 당내 가장 확실한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른 상태다. 천 대표도 원내사령탑으로 자리잡으며 차기 대권 후보군에 한걸음 다가섰다는 평이며 당의장직을 승계한 신기남 의원도 외부 연구조직을 가동하는 등 물밑 대권행보에 시동을 건 듯한 모습이다. 신 의원 주변에선 사전 단계로 ‘차기 서울시장 출마설’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천·신·정’ 3인이 저마다 힘을 받는 현 상황이 과연 이들 3인방의 관계에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까.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지난 1월 당의장 선거에서도 ‘천·신·정’ 그룹은 단일후보를 내야 한다는 주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 의장과 신 의원이 각각 출마를 해 1, 2위를 차지했다.
‘정치를 해도 함께하고 그만둘 때도 함께 그만두자’고 약속한 세 사람의 정신적 공조는 지속되겠지만 앞으로 오직 한 자리뿐인 당 대선 후보 자리를 향한 이들의 정치행보는 ‘협력’보다는 ‘경쟁’에 가깝게 전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