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폴폴 나지만 솥뚜껑 열긴 일러
인천아시안게임 참가를 계기로 냉랭하던 북한 당국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날지 주목된다. 지난 2002년 9월 27일 부산아시안게임 참가를 위해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북한선수단. 연합뉴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임병철 통일부 대변인은 같은 날 인천아시안게임에 응원단을 보내지 않겠다는 북한의 발표에 대해 “우리가 북한 응원단 참여를 시비한다고 왜곡 주장하며 응원단 불참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받아쳤다. 지난 8월 11일 정부의 남북 고위급 접촉 제안을 통한 남북관계 전환 시도가 또 한 번 무산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올 법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긴장이 이어지는 상황을 반영하듯 남북관계를 관장하는 주요 인사들도 다들 무거운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 소식에 정통한 인사들과 관련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실망하기엔 이르다”고 말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1년 6개월 동안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남북관계가 일대 전환점을 맞을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는 것이다.
이런 낙관론은 특히 내년이면 박근혜 정부가 집권 3년차를 맞게 되는 점에 주목한다. 이전 정부에서 남북관계 실무에 참여했던 한 전직 관료는 “시기나 상황을 고려할 때 남측이든 북측이든 ‘지금이 아니면 영영 어렵다’는 판단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며 낙관적 전망을 이어갔다.
“역대 정부의 경험으로 볼 때 의미 있는 남북 정상회담은 집권 3년차까지만 가능하다. ‘통일 대박론’과 ‘드레스덴 구상’ 등 거대 담론으로 기대감을 잔뜩 부풀려놓은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제부터라도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북한 당국도 사정이 급하긴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5년에 이어 박근혜 정부 5년마저 허송세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의 압박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북으로서도 변화의 모멘텀을 잡아야 한다.”
외교·안보라인의 시스템 및 인적 개편을 동반한 박근혜 정부 2기 내각이 출범한 게 여기에 긍정적인 환경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 1기 내각의 외교·안보라인은 김장수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주철기 외교안보수석, 윤병세 외교부 장관, 류길재 통일부 장관,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세월호 참사 등의 여파로 내각이 개편되면서 김관진 전 장관이 국가안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국정원장에는 이병기 전 주일대사가 임명됐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가 부활하는 등 외교·안보라인 시스템도 개편됨에 따라 김규현 전 외교부 차관이 NSC 사무처장을 맡게 됐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정부 안팎, 전문가 집단 내에서는 “외교·안보라인이 매파 중심에서 비둘기파 중심으로 재편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 남북관계 전문가는 “김장수 남재준 등 군 출신 강경파가 주도했던 1기 내각과 달리 2기 내각에서는 온건파인 이병기 국정원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며 “형식상 외교·안보 사령탑은 김관진 안보실장이지만, 그 역시 외교부 출신 김규현 사무처장의 보좌를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인사는 “특히 이병기 국정원장은 박 대통령과 직접적으로 대화하고 설득도 할 수 있는 최측근 인사”라며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온건파 실세가 포진했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 변화”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병기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대중 5주기 조화를 전달하기 위해 개성공단을 방문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가운데)의 모습. 청와대·사진공동취재단
이미 2기 내각 출범 후 정부의 대북 접근법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남북 고위급 접촉 제안 과정부터 이전과는 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선 지난 2월 1차 남북 고위급 접촉이 우리측 제안으로 성사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정부가 추가 제안을 내놓은 것은 그동안 남북관계의 관행에 비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정부 관계자들조차 “남북은 핑퐁 게임을 하듯 서로 한 번씩 제안을 주고받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 고위급 접촉을 제안하면서 정부 당국자가 기자간담회를 통해 “5·24 대북제재 조치 해제,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모든 의제들이 논의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예사롭지 않다. 지금까지 정부는 천안함 폭침, 고 박왕자 씨 피격 등에 대해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없다면 이들 사안을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방침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냉기가 흐르고 있지만 북한 당국의 태도에서도 변화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인천아시안게임 참가를 전격적으로 선언한 것은 이런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한 북한 전문가는 “지난 8월 4일 금강산에서 열린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11주기 추도식에 북측에서 원동연(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 참석하고, 김정은 노동당 제1위원장이 구두친서를 전달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고 말했다. 원동연은 1차 남북 고위급 접촉 당시 우리측 김규현 사무처장의 카운터 파트였다. 이 전문가는 “10주기도 아닌 11주기에 이 정도로 성의를 보였다는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며 “민간 라인을 통해 북측이 우리 정부에 모종의 메시지를 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8월 17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기 조화를 전달하기 위해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가 직접 개성공단을 방문한 것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조화 수령을 위해 개성공단을 방문했던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원래 내가 갈 계획은 없었는데 북측에서 김양건 비서가 나온다며 ‘박지원이 조화를 받으러 왔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다”며 “이명박 정부 때와 달리 박근혜 정부와는 대화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굴뚝에서 연기는 피어오르고 있지만 아직 솥뚜껑을 열기에는 이르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다 된 밥으로 보였던 게 폐기처분된 사례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이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당장 실천 가능한 사업부터 시작해 신뢰를 쌓자고 제안한 것은 상황에 밀려 남북관계 개선을 서두르지는 않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당장 남북한이 해야 할 일은 이산가족 상봉 등을 통해 신뢰 구축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