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찌 채워 억울했다” 자포자기 절도행각
연합뉴스
지난 8월 23일 밤 10시 반. 친구의 렌트카를 몰고 탄벌동 일대를 돌아다니던 한 씨는 홀로 밤길을 걸어가는 20대 여성을 표적으로 삼았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한 달 가까이 됐지만 일정한 직업도, 거주지도 없던 그는 돈이 필요했다. 계획대로 A 씨(22)를 차로 납치해 금품을 요구했지만 나온 건 체크카드와 현금 5만 원이 전부였다. 계획이 틀어진 한 씨는 A 씨를 태우고 광주 일대를 두 시간 가까이 돌아다니며 “친구에게라도 돈을 송금하라고 해라”고 윽박질렀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A 씨를 인근 야산으로 데려가 성폭행하기에 이른다. 범행 후 그는 “제발 살려만 달라”는 A 씨를 송정동에 내려주고 달아났다.
그로부터 30분 뒤. 한 씨는 바로 옆 동네인 경안동에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 하던 택시에 부딪쳐 교통사고를 당했다. 도주했다면 한참을 멀리 갈 수 있었을 시간에 왜 10분 거리에 있는 옆 동네에서 사고까지 당했을까. 수사를 맡고 있는 광주경찰서의 관계자는 “길을 잘 몰라 성남 나가는 길을 찾아 헤매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다.
교통사고를 수사하러 나온 경안지구대 소속 경찰은 한 씨가 무면허 상태에서 운전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임의동행을 요청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납치, 성폭행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사실을 경찰은 까맣게 몰랐다. A 씨가 한 씨 차량을 오인해 검은색 그랜저라고 경찰에 진술했기에 한 씨가 몰던 진회색 YF소나타 차량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
하지만 한 씨의 날카로운 인상을 눈여겨본 경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을 찍어뒀다. 자신의 범죄 행각이 드러날까 우려한 한 씨는 전화를 받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지구대를 빠져나와 도주했다.
사진을 건네받은 광주경찰서에서는 A 씨를 통해 한 씨가 범인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한 씨는 이미 10분 전에 행방을 감춘 후였다. 경찰을 더 당황하게 만든 건 한 씨가 전자발찌 착용자였다는 사실이었다. 수사를 맡은 한 경찰 관계자는 “지구대 인근 하천 물속에서 위치송신기를 발견했다. 보호관찰소에서 직원이 나왔지만 전자발찌를 뗐는지 여부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한 씨는 인근 편의점에서 3000원을 주고 가위를 사서 전자발찌를 잘랐다. 법무부가 성폭행범 관리를 위해 도입한 첨단시스템이 3000원짜리 가위 하나에 허무하게 잘려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목적지도 없이 지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시외버스를 타고 곤지암 동원대까지 간 그는 또 무작정 다음에 오는 서울행 버스를 갈아탔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내려 인근 상점에서 옷을 사서 바꿔 입고 경찰의 눈을 피했다. 또다시 무작정 버스를 타고 잠실에서 내렸다. 잠실역 부근에서 쉬고 있던 그는 두 번째로 경찰을 마주친다. 공개수배 전단지로 그의 얼굴을 알아본 시민이 제보를 했던 것. 한 씨는 경찰을 피해 중국인들이 가득 탄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관광객들은 버스에 함께 탄 불청객을 알아채지 못했다. 덕분에 공개수배범 신분으로 북촌 한옥마을 등지를 돌아다니며 관광 아닌 관광을 했다.
노숙을 하며 버스를 타고 헤매길 사흘째. 경찰에 두 번째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경기도 용인에 한 씨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대를 탐문하던 경찰은 긴팔 옷을 두 개나 껴입고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 쓴 한 씨를 발견해 검거에 성공했다.
경찰에서 한 씨는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간간이 돈이나 옷을 훔쳤다”고 진술했다. 서울에서 두 번 절도를 시도했지만 한 번은 미수에 그쳤고 한 번은 대학생의 가방을 훔쳤지만 가방 안에 돈은 없었다. 용인에서도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에 옷을 훔쳐 달아난 적이 한 번, 돈을 훔친 일이 한 번 있었다. 네 번의 절도 시도를 했지만 그가 건진 건 버스비 몇 푼이 전부였다.
경찰은 지난 8월 15일과 16일 경기도 성남 일대에서 일어난 두 건의 강도도 그의 소행임을 밝혔다. 그는 “야탑에서 카페에 들어가 종업원을 위협해 3만 원을 훔쳤다. 또 모란에서도 편의점에서 돈을 훔치려 했지만 손님이 들어와 도망나왔다”고 진술했다.
한 씨는 경찰에서 “성폭행범도 아닌데 전자발찌를 채워 억울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돈 많이 훔쳐서 그간 신세진 사람들이랑 엄마에게 나눠주고 자살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실제 그의 소지품에선 어머니 앞으로 쓴 유서가 발견됐다. 그는 출소 후 심한 우울증을 겪어 정신과까지 다녔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를 맡았던 광주경찰서 형사과장은 “납치, 성폭행이 작은 죄는 아니지만, 어리바리한 절도 경력에 우울증까지 겪고 있어 측은한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