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보스’ 여전히 어둠의 지배자
▲ 영화 <거룩한 계보>의 한 장면. | ||
대부분의 일선 경찰들은 “용어의 혼용일 뿐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세하나마 그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조직폭력은 ‘폭력’에 악센트가 있는 반면 폭력조직은 ‘조직’에 그 악센트가 있다는 점이다. 즉 과거에는 주로 집단 패싸움과 회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폭력 범죄에 치중된 반면 오늘날에는 기업을 가장한 조직적인 범죄 행태가 주를 이루는 셈이다. 이번에 나온 방대한 양의 보고서의 최대 핵심 역시 최근 조폭의 범죄 행태가 ‘합법을 가장한 기업화’로 변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숨은 그림자에는 ‘두목’ 혹은 ‘고문’으로 불리는 과거의 유명 조폭 보스급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조폭 전문가인 한 일선 경찰관은 “유명 조폭 두목들이 ‘나는 이제 조폭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사업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업체 주변은 여전히 조폭 세력과 연계되어 있다”며 “그들은 절대 조폭 세계와 단절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21세기가 왔지만 밤의 세계에선 여전히 70~80년대의 ‘명성’이 ‘추억’으로 머물지 않고 ‘실세’로 남아 있는 셈이다.
대검이 현재 관리하고 있는 전국의 폭력조직은 2006년 3월을 기준으로 491개 파이며 이에 가담하고 있는 조폭은 1만 193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또 다른 대검의 자료에는 전국 조폭이 368개 파이며 그중에서도 유독 활동이 왕성한 조폭 87개 조직을 ‘강’급으로 분류해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체 조직의 수에서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와 집계 방식의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경찰청이 파악하고 있는 자료 역시 검찰 자료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검·경의 특별 관리 조직에 지난 80년대 ‘조폭 르네상스’를 풍미했던 유명 조폭 세력이 여전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23년간의 조폭 수사로 이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송파경찰서의 안흥진 경위는 “오늘날 조폭은 이미 기업화됐고, ‘칠성파’니 ‘서방파’니 하는 유명 전국구 조폭들의 이름은 이제 완전히 그 세계에서 ‘브랜드화’ 되어 버렸다. 사장이나 회장은 바뀔망정 삼성이니 LG니 하는 재벌그룹은 영원히 가는 것처럼, 조폭 역시 두목 부두목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더라도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밝혔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형정원의 폭력조직에 대한 5건의 연구보고서와 안 경위가 대내 수사용으로 작성한 ‘한국조직폭력의 실태 및 효과적인 대처방안’ 등을 보면 최근 조폭의 주요 변화 추세 중 하나로 두목 및 부두목과 고문의 역할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형정원의 보고서에는 ‘전국의 폭력조직 현황을 고찰함에 있어 수사기관이 조폭 가담 인원으로 집계하지는 않지만 폭력조직의 제2선에서 막후실세로 군림하는 자들이 전국에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이들이야말로 비록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폭력조직 간의 충돌을 막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통해 폭력세계의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과거에 폭력조직에서 쌓은 악명을 재산으로 업소의 보호자로 대접을 받거나 혹은 재력가나 사업가 행세를 하면서 정·관계와 폭력조직을 연결해주거나 폭력조직 간 이권다툼 등을 중재하는 이른바 해결사(브로커)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밝히고 있다.
통상적으로 폭력조직은 피라미드식 구조로 두목 부두목 행동대장 행동대원으로 분류되고 그밖에 고문 및 자금책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 대상인 두목의 경우 과거에는 ‘부두목 이하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솔하는 자’로 정의됐지만, 최근에는 ‘배후에서 일체의 조직 활동을 보이지 않게 지휘하는 자’라는 의미가 포함되고 있다. 실제로 조폭세계에선 두목이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배후에 숨는가 하면 부두목을 두목으로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도 많고, 두목과 부두목 고문 등이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영화 <보스>의 한 장면. | ||
부두목은 두목의 지휘를 받아 행동 양식을 행동대장 및 대원들에게 지휘하는 역할인데 과거 80~90년대 대대적인 범죄 소탕 작전으로 수괴급 유명 조폭 두목들이 대거 검거됐을 때 이들은 대개가 두목의 유고를 대신해 조직을 이끌어 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날 자연스럽게 유명 조폭의 두목으로 성장한 이들도 많다. 이 보고서에는 ‘두목이 사망하거나 고문 혹은 대부 등으로 일선에서 은퇴하는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부두목이 그 직위를 승계하지만 그렇지 않고 두목이 계속 존재하거나 내부 불화가 생기면 ‘신○○파’로 분파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일선 경찰 관계자들은 과거 유명 조폭의 행동대장으로 악명을 떨치던 자들이 최근 대거 출소한 이후 조직의 두목 또는 부두목급으로 주요 포스트에 위치하는 자들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안 경위는 “대표적인 예로 영화 <친구>의 주인공으로 유명세를 탄 권 아무개 씨는 부산 칠성파 두목 이 아무개 씨를 대신해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 뿐만 아니라 ‘3대 패밀리’를 비롯한 주요 조직들도 왕년의 두목들은 모두 숨고 과거 부두목이나 행동대장급들의 이름이 최근 활발히 거론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왕년의 두목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의 주장처럼 밤의 세계에서 완전히 손을 씻고 은퇴한 것일까.
이 부분에서 또 하나 주목해볼 것은 ‘고문’이다. 형정원 보고서에는 ‘고문은 일단 현역에서 은퇴한 후 개인 사업에 진출하였으면서도 조직과는 완전히 절연치 못하고 은밀히 연결되어 그 위력을 직·간접적으로 이용하는 자를 말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들(고문)은 공식적인 피라미드 조직에서는 벗어나 있으면서도 조직에 직·간접적으로 기여를 하고 또 자신도 이를 이용함으로써 이권 취득 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이들은 조직의 위기를 타개할 목적으로 평소 사법당국의 실력자, 성직자, 경제계 주요 인사는 물론 유력 정치인들과도 친분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현재 수감된 22명의 행동대장급 이상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실세들과의 친분 정도’를 조사한 결과 ‘경제계 인사와 친하다’는 응답은 45.5%, ‘사법당국 실력자와 친하다’는 응답은 31.8%, ‘유력 정치인과 친하다’는 응답은 22.7%로 각각 나타났다.
일선 조폭 담당 경찰관들은 폭력조직의 경우 오늘날 그 형태가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40~50대의 두목, 30~40대의 부두목 혹은 행동대장, 10대 후반~20대의 행동대원, 그리고 50대 이상의 고문을 가장 이상적인 조직 형태로 본다고 말한다.
특히 경찰청 자료 통계에 나타난 최근 5년간의 조폭 검거현황을 살펴보면 40~50대 이상의 검거율이 2001년 5.09%, 2002년 5.61%, 2003년 9.02%, 2004년 11.13%, 2005년 9.69%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경향은 과거 80~90년대의 조폭 검거 연령대가 사실상 모두 20~30대로 채워졌다는 점에서 조폭 구성원의 연령층이 점차 높아지는 것을 반증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 영화 <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 | ||
안 경위 역시 “지난해 호남의 유명 조폭인 K 파의 두목 출신으로 알려진 Y 씨의 딸도 결혼식을 올렸는데 조폭들이 대거 모였다고 한다. Y 씨는 법정에서 ‘나는 조폭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지역의 조폭세계에서는 여전히 그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얘기가 들려온다”고 밝혔다.
‘범서방파’의 두목 출신 김 아무개 씨는 2년 전 17년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석방됐지만 지난 연말 뇌물 공여 혐의와 영화배우 협박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그는 현재 지병 때문에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진주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방계 조직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진 범서방파의 경우 부두목 및 행동대장 출신들이 여전히 범서방파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거나 다른 방계조직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고 일부는 지난해 사행성게임기 비리로 구속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양은이파’의 두목 출신 조 아무개 씨는 지난해 강남에서 운영 중이던 음식점을 폐업한 뒤 전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전언이다. 일각에서는 해외 출국설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경찰 관계자는 “최근까지 확인한 바로는 출국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OB파’의 두목 출신 이 아무개 씨의 경우 최근 호남 출신 원로 주먹들 사이에서 “한번씩 한국을 다녀가곤 한다”는 얘기가 부쩍 회자됐다. 그러나 한 경찰 관계자는 “이 씨 또한 출입국 기록을 확인한 결과 본인의 이름으로 입국한 흔적은 없었다”며 “그래도 주변에서 봤다는 얘기가 잇따르는 것을 보면 다른 이름으로 입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간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미국 현지의 정보망으로는 LA 한인 지역에서 움직이는 한인 폭력조직 L단의 배후 세력으로 유명 조폭 출신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얘기도 나온다”며 해외 조직과 국내 세력과의 연계 가능성을 우려하기도 했다.
조폭 수사에 조예가 깊은 한 수사 관계자는 “양은이파와 OB파 역시 여전히 그 명성은 살아 있다. 과거 부두목 및 행동대장들이 최근 사업을 한답시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수원의 ‘N파’ 전주의 ‘W파’ 목포의 ‘M파’ 부산의 ‘S파’ 등 지방의 유명 조폭 두목 및 부두목 출신들도 서울과 지방에서 사업가 또는 단체장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전형적인 조직의 고문 스타일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