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량 무거운 청부살인 주장 ‘이상한 랭가’
“할아버지를 죽일 때 어떤 무기를 사용했죠?”
내가 물었다.
“주먹으로만 때렸습니다.”
랭가가 대답했다.
“왜 주먹만 사용했죠? 흉기를 써야 빨리 끝낼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
랭가는 대답이 없었다. 주먹을 휘두르는 건 순간적인 격분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난 그걸 물었던 것이다. 재판장이 그런 세심한 사항까지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살인이 종종 벌어지고 있었다. 죽은 영감이 살던 이웃마을인 동천리에서도 태국인 노동자가 혼자 살던 늙은 밭주인을 쇠파이프로 때려죽이고 연탄보일러 화덕에 집어넣어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 밭주인이 욕을 하는 바람에 격분했다는 것이다.
“살인을 하던 거실 의자 위에 긴 톱이 있던데 봤었나요?”
사체의 절단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도구였다.
“봤습니다.”
그는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집 뒤가 야산이고 과수원인 거 알죠?”
“압니다.”
“할아버지를 거기다 묻어 버릴 계획은 없었나요?”
“장영두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집 뒤 과수원 흙구덩이에 파묻으면 간단한데 왜 굳이 차에 싣고 저수지까지 가자고 그랬을까요?”
랭가가 진술한 조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전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허위일 가능성이 컸다.
“죽인 할아버지의 시체를 어떻게 했어요?”
“그대로 거실에 두고 도망갔습니다.”
“감추어두지도 않고 그냥 도망친 이유는요?”
청부살인범이라면 시신을 집안 어딘가에 숨겨야 맞았다.
“무서워서 그냥 도망 나왔습니다.”
“밤에 다시 가서 시체를 처리했어요?”
“안 했습니다.”
“왜죠?”
“무서워서 가기 싫었습니다.”
랭가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 사건은 청부살인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우발적인 사고의 냄새가 농후했다. 그런데도 방글라데시인 랭가는 철저하게 청부살인이라고 진술이 일관된 것이다.
“할아버지 아들 중 누가 살인을 하라고 시켰다고요?”
내가 그의 주장의 핵심부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장영두가 아들 둘 중 정확히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돈이 없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살인을 청부한 아들의 특징으로 들은 건 뭐죠?”
“장영두가 정확히 누구라고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친구라고 했습니다.”
장영두는 툭툭 실없는 소리를 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장영두가 거짓말을 랭가에게 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랭가는 방글라데시로 바로 도망가지 않고 그냥 한국에 있다가 체포됐는데 왜 그랬죠?”
내가 물었다.
“….”
랭가는 대답이 없었다. 조서에는 돈을 받으려고 출국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랭가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살인을 청부한 범인이 잡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1~2년 있다가 잡힐 걸로 압니다.”
침묵하며 말을 듣던 재판장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를 않네.”
랭가가 더 무거운 형이 과해질 살인청부를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재판장이 통역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명령했다.
“이봐요, 통역인. 저 방글라데시인에게 물어보세요. 방글라데시 법에서는 청부살인하고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거하고 어떤 게 형이 더 높은지 말이에요.”
통역이 랭가와 빠른 어조로 말하다가 재판장에게 대답했다.
“자기는 방글라데시 법에 대해서 모른답니다.”
“그러면 본인 생각으로 볼 때 어떤 게 형이 더 무거운가 대답해 보라고 하세요.”
통역이 또 랭가와 한참을 얘기한 후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 생각으로는 살인을 부탁한 사람이 꼭 감옥에 가야 한다고 해요.”
랭가는 벌써 그 말을 재판의 처음부터 여러 번 반복했다. 그는 돈 주기로 약속한 살인교사자를 압박하려는 의식이 강했다. 통역은 재판장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랭가의 의사만 전하는 셈이었다. 재판장이 다시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시켜서 살인을 한 거하고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거하고 어떤 게 더 나쁜 죄인지를 물어보라니까.”
“시켜서 사람을 죽이는 게 더 무겁대요.”
“그렇지, 누가 봐도 그건 상식이잖아? 그런데도 청부살인을 계속 주장한단 말이야.”
재판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재판장이 이번에는 장영두에게 물었다.
“왜 랭가가 저런 말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재판장님, 그렇다면 살인을 시킨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제가 죄를 다 뒤집어쓰면서 무기징역의 위험까지 감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장영두가 되받아쳤다. 그가 계속했다.
“검찰에서 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해 달라고 하는 마당에 청부살인이라면 제가 왜 입을 다물겠습니까?”
장영두가 답답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 보면서 재판장이 말했다.
“물론 검찰에서 형을 줄여주겠다고 하면서 랭가를 회유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미 랭가에게 징역 13년이 떨어진 상태인데 지금까지도 검사에게 협조할 필요가 있을까?”
재판장은 수사기록을 들추면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심 공판정에서 장영두가 자백한 걸 보면 사실은 영감을 죽일 마음이 있었는데 사건 당일인 그날만은 그게 아니었다라는 식으로 말한 걸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말했어요?”
“아닙니다.”
장영두가 고개를 흔들면서 단호하게 부인했다.
“아닙니다라고 그렇게 부인할 게 아니지. 일심 공판정에서 장영두 씨가 직접 그렇게 얘기한 걸로 여기 공판 조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안 되죠.”
공판정에서의 진술은 절대적인 신뢰와 증명력을 인정받았다. 공개된 법정과 판사는 고문이나 협박과는 무관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앞뒤 다 말을 잘라먹고 ‘너 사람 죽였지? 그러려고 했지?’ 해서 그렇다고 한 건데요.”
재판장은 기록을 들춰보면서 장영두에게 계속 질문했다.
“여기 보면 차에 있는 쇳덩어리를 죽은 영감에게 달아 저수지에 던질 거라고 되어 있는데 어때요? 사실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제 차가 봉고기 때문에 겨울에 눈길에서 다니기 쉽게 하기 위해서 차에 두었던 거예요. 사건 당일은 차에 그 쇳덩어리가 있지도 않았어요.”
“법원에서 죽은 영감의 땅에 관한 법률서류를 뗐다면서요? 죽은 영감님이 의심이 아주 많아서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았다는데 왜 그랬죠?”
“그 영감님이 부탁을 하셔서 심부름으로 했습니다. 제 집이 그때는 바로 법원에서 가까워서 그랬습니다.”
재판장은 고개를 갸웃하고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
“일심 재판장이 여러 가지를 물었었는데 왜 지금 말이 또 달라지는 거죠?”
판사들은 진술의 일관성이 없는 걸 싫어했다. 범인들은 어떻게든지 빠져나가려고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면서 안간힘을 썼다.
“경찰, 검찰에서 제가 그렇게 진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변호사에게 물어봤더니 그냥 모든 걸 인정하라고 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닌데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진실대로만 말할 겁니다.”
“좋아, 그렇다면 랭가에게 돈을 준 이유는 뭡니까? 같이 영감에게 갔던 랭가가 우발적으로 격분해서 죽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옆에서 도왔다면서요? 그렇다면 랭가에게 돈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텐데 왜 돈을 줬어요?”
재판장이 물었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영감님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저고 하여튼 제가 더 책임이 많다고 생각해서 줬습니다.”
“돈을 준 거까지 들키면 나중에 더 의심을 받을 텐데?”
재판장이 장영두의 표정을 예리하게 살폈다.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재판장은 수사기록 중 한 페이지를 들춰보면서 물었다.
“다른 사람 명함을 죽은 영감에게 넣어뒀던데 왜 그랬죠?”
“그런 적 없는데요?”
장영두가 재판장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가 계속했다.
“그게 아니고 시신이 발견되고 제가 참고인으로 불려가 두 번이나 조사를 받았어요. 그때 수사가 다른 방향으로 갔으면 하고 기대해 봤어요.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 명함을 버린 랭가의 피 묻은 옷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더 다른 신문을 하실 게 없습니까? 없으면 증거조사로 들어가겠습니다.”
재판장의 질문이 끝났다.
“한 가지 장영두에게 더 확인할 게 있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뭡니까? 하시죠.”
재판장이 선한 표정으로 기회를 주었다. 내가 장영두를 보면서 물었다.
“얼마 전에 수사를 한 검사실로 다시 불려갔었다면서요?”
난 그의 형 장영목으로부터 그 내용을 들었다.
“네, 교도소에서 검사실로 갔었습니다.”
“무슨 일로요?”
“검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보고 이제 진실을 밝힐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정말 검사님이야말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 달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검사님이 저보고 그동안 사람 참 많이 변했다고 그러시는 겁니다.”
검사는 청부살인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법정에 앉아 있던 공판검사가 장영두를 달래듯 말했다.
“피고인 장영두는 누가 뒤에서 살인을 교사했는지 그걸 이제는 말해 줄 수 없어요?”
그 역시 청부살인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영두가 바로 맞받아쳤다.
“제가 오히려 검사님한테 부탁을 하는데 정말 이게 누가 시켜서 한 일인지 아닌지 제대로 수사해 달라고요.”
그 말을 들은 공판검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어조를 높였다.
“이보세요, 장영두 피고인. 피고인도 입을 닫고 영감의 아들도 말 안하면 검찰이 어떻게 진실을 알겠습니까? 검사가 신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무서운 선입견이었다. 재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