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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각을 둘러싸고 정 전 의장과 노무현 대통령 사이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이종현 기자·청와대사진기자단 | ||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14일)으로 사실상 집권 2기를 맞게 된 노 대통령이 여권 내에서 차기 대권경쟁이 조기 과열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입각 카드’를 제시한 데 대해, 정 의장측이 반발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여권의 ‘넘버 1’과 실질적인 ‘넘버 2’가 맞서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비슷한 예라 해봐야 6공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알력을 빚었던 일이 고작.
정 전 의장의 진로를 둘러싼 논란은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 구상과 정 의장의 ‘대권 플랜’이 충돌하면서 비롯됐다는 것이 여권 내의 일반적인 평가다. 의장직 사퇴(17일)와 함께 “당분간 휴식을 취하겠다”고 밝힌 정 전 의장이 권력 생리상 결국은 노 대통령의 뜻대로 입각 쪽으로 정리할 것이란 분석이지만, 정 전 의장 주변에선 여전히 ‘입각 불가’ 의견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입각을 하더라도 독자적 스케줄에 따라 이뤄져야지 청와대가 요구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내각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강경론’이라 하겠다.
정 전 의장측이 이처럼 입각에 대한 입장 표명을 미루면서, 정 의장을 바라보는 청와대의 시각도 점차 싸늘해지고 있다. 정 전 의장과 김근태 의원, 김혁규 상임중앙위원 등 열린우리당내 차기 대권주자들을 모두 내각에 불러들이겠다는 노 대통령의 메시지를 ‘알아들을 만큼’ 전달했건만, 유독 정 전 의장측만 ‘항명’(抗命)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데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고 나선 것이다. 한편에서는 입각이 불가피함에도 입장표명을 질질 끌고 있는 정 전 의장의 정치적 감각을 문제 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여권 내에선 벌써부터 입각 문제로 표면화된 노 대통령과 정 전 의장 간 ‘불협화음’이 향후 개각 내용과 관계없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 양자 관계가 단순히 ‘입각 셈법’의 차이에서 틀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차기 대권구도에 대한 ‘이몽’(異夢)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노(盧)-정(鄭) 갈등설’의 배경과 전망을 추적해 봤다.
기정사실로 여겨졌던 정 전 의장의 입각이 다시 불투명해진 것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11일) 직후부터. 경선에선 당초 불리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당권파인 천정배 의원이 비당권파 이해찬 의원을 78 대 72로 물리치고 당선됐고, 이를 기점으로 정 전 의장 측근들 입을 통해 입각 대신 ‘당 잔류’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정 전 의장측이 진로 문제의 공론화 시기를 경선 이후로 잡은 것은 원내대표 경선이 당권파와 비당권파 간 ‘세(勢) 대결’ 양상으로 전개됐던 것과 관계가 있다. 정 전 의장의 ‘라이벌’인 김근태 전 원내대표가 노 대통령의 입각 권유를 받아들여 연임을 포기한 터에, 정 전 의장측에서 돌연 ‘입각 불가’를 선언할 경우 당권파 견제심리가 발동돼 판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 특히 김 전 대표측으로선 ‘정동영-김근태 동반 입각’을 전제로 원내대표 자리를 포기했는데, 정 의장측이 뒤늦게 당에 남겠다고 할 경우 신의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 전 의장측은 이 무렵부터 입각 대신 당 잔류 입장을 흘리기 시작했고,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 재충전을 위해 해외유학을 갈 것이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측근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심판 이후 이뤄질 개각 때 김 전 대표는 입각하기로 노 대통령과 ‘약조’가 돼 있지만, 정 의장과는 뚜렷한 약속이 없는 것으로 안다. 이번에 정 의장이 입각하지 않으면 내년 이후에나 입각할 것으로 보인다”고 얘기했다. 이른바 ‘정동영-김근태 순차 입각’ 주장이다.
당 잔류를 넘어 아예 당 의장직을 유지하라는 내부의견도 적지 않았다. 이종걸 의원 등 측근 의원들을 중심으로 “당 정비와 정당 개혁 등 과제가 남아 있으니 남아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얘기가 계파 의원 모임에서 제기된 것이다. 비당권파의 반발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임기(2년)를 다 채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6월 하순 단행된 개각에서 ‘징발’당하는 것만 피한 후 적당한 때 의장직을 그만두면 모양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입각 불가론’이 제기된 가장 큰 원인은 노 대통령의 권유대로 무턱대고 내각에 들어갈 경우 ‘대권 스케줄’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면에는 총선 직후 노 대통령 주변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정 전 의장에 대한 ‘견제’ 움직임이 자리잡고 있다.
정 전 의장의 한 측근은 “총선에서 비례대표직까지 버리며 원내 과반을 얻은 정 전 의장에게 총리도 아닌 각료로 입각하라는 것은 여러모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다. 더구나 노 대통령이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을 차기 총리로 지명할 뜻을 밝히면서 정 전 의장에게 그 밑에서 장관을 맡으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냐. 정 전 의장의 여권 내 위상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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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영 전 우리당 의장 | ||
김대중 정부 시절 각료를 지냈던 또다른 측근도 “여당 대표 하던 사람이 총리도 아닌 일반 각료로 내각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노 대통령 주변에서 뭔가 ‘저의’를 갖고 정 전 의장을 입각시켜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특히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김혁규 총리’ 카드를 강행하려는 배경과 관련, “여권 핵심부가 차기 대선에서도 ‘영남 후보론’을 들고 나오려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경계심을 표시해 눈길을 끌었다.
실제 정 전 의장측은 4·15 총선 당시 ‘노인 폄훼’ 발언 이후 영남권에서 ‘반(反) 정동영’ 기류가 확산되고 있는 데 대해 고민해 왔다. 정 전 의장은 14일엔 영남권 낙선자들을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으로 초청해 위로 오찬을 함께하며 “총선 기간이 인생에서 정말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아직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고 깊은 부담을 안고 있다”며 사과했지만, 김정길 상임중앙위원 이강철 국민참여본부장 김두관 경남도당 위원장(전 행자부 장관) 등 친노(親盧) 핵심인사들이 대거 불참해 관계개선이 아직은 요원함을 드러냈다.
정 전 의장측은 또 김혁규 상임중앙위원과 이강철 본부장 등의 주도로 최근 영남권 당선자들이 잇달아 회동을 갖고 있는 데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13일 만찬회동에 경남 출신인 청와대 박봉흠 정책실장과 박정규 민정수석까지 참석한 것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다. 총리에 사실상 내정되면서 ‘영남후보론’의 당사자로 거명되고 있는 김 위원을 중심으로 여권 핵심인사들이 결집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 전 의장 주변의 이같은 기류와 행보에 대한 노 대통령측의 반응은 ‘난센스’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입각 권유를 음모론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문제지만, 노 대통령의 차기 구상에 대한 ‘정동영 죽이기’란 아전인수적 해석에는 불쾌감까지 표시하고 있는상황이다.
열린우리당의 노 대통령 한 핵심측근은 “정 전 의장측이 여권 전체의 역학구도와 관련한 입각 문제를 개인의 선택 차원에서 다루는데, 한마디로 잘못 짚었다. 이제 (입각이)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하는 시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 정 전 의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 측근은 “총선 후 여권의 진용 개편은 이미 시작됐으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정 전 의장이 끝까지 입각을 마다한다면 노 대통령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결론이 뻔한데도 구태여 노 대통령과의 신뢰관계를 해치면서까지 잘못된 길을 찾아 헤매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남후보론’에 대한 정 전 의장측의 ‘오해’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노 대통령의 영남권 한 핵심측근은 “다음 대선을 앞두고 여권 내에서 영남후보론이 불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노 대통령이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대세론’에 영남후보론으로 맞서 후보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지금은 누구도 영남후보 운운할 때가 아니며, 더욱이 차기 경쟁에서 가장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정 전 의장측이 먼저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차기’에 대해 ‘노심=무심(無心)’인데 정 전 의장측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측근은 “여권 내에서 영남후보론이 대두되지 않도록 하는 첩경은 열린우리당이 하루라도 빨리 전국정당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역구도가 다음 대선 때까지 유지된다면 영남후보론은 필연적으로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차기 대권을 위해 지금 정 전 의장이 해야 할 일은 적어도 영남권에서 비토(Veto)하는 인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과 노 대통령을 도와 전국정당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 이 두 가지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측은 그러나 정 전 의장이 지닌 대중적 인기와 열린우리당 창당과 총선 과정에서의 역할 등을 고려해 가급적 양측간 관계가 전면적인 갈등으로 비춰지는 데 대해서는 부담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노 대통령측으로서도 정 전 의장의 입각을 둘러싸고 열린우리당 내에서 ‘친정(親政) 체제’ 논란이 불거질 경우 여러모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 핵심 관계자는 “정 전 의장이 의장직을 사퇴한 만큼 이제 차분하게 청와대와의 갈등을 풀 여건은 마련되었다고 본다”며 “조만간 두 사람이 다시 독대해 노 대통령이 입각 권유에 담긴 자신의 구상을 보다 직접적으로 밝힌다면 정 전 의장도 그간의 오해를 풀고 흔쾌하게 내각에 참여하는 쪽으로 매듭이 지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