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핵폭탄’ 될까 ‘불발탄’에 그칠까
▲ 지난 21일 김유찬 씨가 기자회견을 열어 이명박 전 시장의 위증교사를 주장하며 녹음테이프를 보이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한 주 동안 언론지상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들이다. 그리고 이 같은 날 선 단어들의 홍수 한가운데엔 한때 ‘군신’의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이 있다. 현재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그에 대해 ‘도덕성 폭로’ 공세를 펴고 있는 김유찬 전 비서관. 이 두 사람의 공방전은 설 이후 대선 정국을 점점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김유찬 진실게임’은 서로 폭로와 의혹만 난무할 뿐 그 실체 규명은 난망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두 차례의 기자회견을 통해 공세를 강화했던 김 씨는 곧 <이명박 리포트>라는 책을 출간할 계획을 밝혔지만, <일요신문>이 확인한 초고의 내용 역시 지금껏 제기된 갖가지 의혹들을 정리한 수준에서 크게 나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박스기사 참조).
진흙탕 싸움 속에 갖가지 의혹만 난무하는 이번 사태의 핵심은 ‘이 전 시장의 도덕성 검증’이다. 이 전 시장으로서는 자신에게 제기되는 ‘진실 은폐 조작’과 ‘허위증언 사주’에 대한 의혹을 벗어내야 하는 지상과제를 안았다. 반면 그동안 잦은 말 바꾸기로 불신을 가중시켰던 김 씨 또한 ‘10년 만의 재폭로 배경’과 ‘상암DMC 경쟁입찰에 뛰어든 과정’ 등에 대한 의혹을 받고 있다. 이번 사태의 핵심 4대 의혹을 재조명해본다.
의혹 1 - ‘김유찬 배후설’, 그의 배후는 과연 존재하나?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관심 중 하나는 이명박 전 시장 측의 주장대로 ‘김유찬의 배후’에 진짜 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전 시장의 측근인 한나라당의 정두언 의원은 “김 씨가 누군가와 거래를 했든지,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씨는 2월 23일 오전 자신의 여의도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초 이 전 시장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바로 알리기 위해 책을 준비한 것은 맞지만 기자회견은 전혀 계획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정인봉 전 의원이 찾아와서 만나게 됐고 그가 기자들에게 내 얘기를 하면서 각 언론사 기자들의 취재 요청이 빗발치는 등 그야말로 ‘엉겁결에’ (기자회견장에) 떠밀려 나오다시피 했다”고 밝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캠프의 개입설과 여권의 ‘야권 분열’ 음모설 등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여권의 한 중진 의원은 “김 씨 자체를 믿지 못하는데 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무모한 계획에 관여하겠느냐”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과 김 씨 주변 관계자들 사이에선 “정치적 야망이 있는 김 씨가 대선 정국에 맞춰 스스로 준비한 계획일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유력 대권주자인 이 전 시장과 맞서면서 자신의 위상도 높아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전 시장의 국회의원 시절 지구당 사무국장을 지낸 권 아무개 씨는 23일 오후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그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기보다는 그 사람 자체가 원래 그렇게 돌출적인 사람이다. 책 또한 원래는 지금 출간할 예정이 아니었는데 이번 사태가 터지면서 갑자기 출간을 부랴부랴 서두르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권 씨는 김 씨가 21일 기자회견에서 “96년 당시 이 전 시장 측의 K 국장과 J 부장이 내게 위증교사를 목적으로 돈을 건넸다”며 녹취록의 일부를 공개했을 때 언급됐던 바로 그 K 국장이다. 그는 이후 김 씨와 호형호제하며 한때 김 씨 회사의 본부장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의혹 2 - 베일에 가려진 김 씨의 10년 세월과 상암DMC 사업
김 씨는 96년 9월 ‘폭로’ 이후 해외 도피에 나서는 등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매달 이 전 시장 측으로부터 용돈을 받아 쓸 정도로 궁핍했다. 그랬던 김 씨가 10년 만에 자금 수조 원대 규모의 대형 국책사업의 입찰 경쟁에 참여하는 회사의 대표로 그 모습을 나타내면서 베일에 가려진 그의 10년 세월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 씨는 피선거권이 회복된 98년 지방선거에 서울 영등포구청장 후보로 무소속 출마했으나 2%대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김 씨는 “당시 개인의 명예회복과 나름대로의 소신을 갖고 구청장에 출마하면서 ‘구원’을 털어버리기 위해 이 전 시장을 찾았으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험악한 말을 듣고 ‘모멸감’을 느꼈다”며 “이후 일절 이 전 시장을 찾지도 만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김 씨는 사업가로의 변신 과정을 묻는 질문에 대해 “선거 낙선 이후는 말 못할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맨손으로 직접 부딪히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라오스로, 미국으로 가리지 않고 해외를 다니며 고생한 끝에 2002년 말경 미국 유수의 부동산자산관리업체 ‘나이’(NAI)의 한국지사 대표직을 제의받았다”고 밝혔다. 현재 그의 직함은 (주)서울IBC 대표이사로 되어 있다. 이 회사는 상암DMC 경쟁 입찰에 참여했던 ‘나이 아메리카 컨소시엄’의 참여 업체였다.
항간에는 사업가 경력이 거의 없는 김 씨가 ‘나이’의 한국지사 대표를 맡을 수 있었던 점에 대해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 자신이 이 전 시장과의 인연을 내세운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 정두언 의원은 “김 씨가 이 전 시장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투자자들을 모으고 다녔다”고 주장했다. 즉 김 씨가 상암DMC 사업에 관심이 있는 ‘나이’ 관계자에게 자신이 이 전 시장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김 씨는 “나는 오히려 ‘나이’ 측에게 이 전 시장과의 악연을 공개했다. 회사 측도 다소 우려했지만 나는 ‘이 전 시장이 진정한 공인이라면 그런 한때의 구원으로 우리 회사에게 불리한 처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반박했다.
의혹 3 - 이 전 시장 측의 조작 은폐 시도 사실인가?
김 씨의 2차 기자회견 직후 이 전 시장 캠프 측에서는 그의 주장의 허구성을 주장하며 그 증거로 김 씨가 현재 출간을 앞두고 있다는 <이명박 리포트>의 2002년판 가제본을 공개했다. 이 전 시장 측은 “김 씨가 2002년판에서 밝힌 내용과 지금 주장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김 씨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는 “내가 <이명박 리포트>를 처음 준비한 것은 96년 말이었고, 97년 초 원고를 완성했다. 하지만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원고가 유출됐고 결국 출간을 못했다. 2002년에는 책을 낼 계획도 없었고, 가제본 또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이 전 시장 측에서 유출된 내 원고에 ‘말도 안 되는’ 다른 내용을 덧씌워 자기들 마음대로 가제본을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이 전 시장 측의 조작 가능성을 주장했다.
김 씨는 “기자회견 직후 나를 도와주던 형님들이 자신의 어려운 입장을 호소하며 발을 빼고 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전 시장 측에서 참 필사적으로 나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10년 전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형님’ 중의 한 명인 권 씨와 주고받은 메일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어제 라디오 인터뷰에서 형님이 ‘나는 김 씨의 출간을 반대했고 내게 글을 써 달라는 것도 거절했다’고 밝혔지만, 처음에는 내 책의 일부 내용을 직접 수정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함께했다. 심지어 ‘이명박 리포트’라는 제목이 좀 약하다고 ‘허구와 신화’라는 새 제목을 달아주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권 씨는 “내가 수정해준 것은 ‘기어이 책을 내겠다면 너무 한 개인을 매도하는 쪽으로 하지 말라’는 뜻에서 격한 표현을 좀 완화해준 것이다. 제목을 바꾸자고 한 것도 역시 같은 차원에서 제안한 것인데 오히려 김 씨는 이를 바꿔서 얘기하고 있다”고 불편해 했다. 그는 “공개된 녹취록 가운데 김 씨에게 ‘나도 압박을 받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 무슨 뜻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 표현도 내가 가족들한테 압박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지, 이 전 시장 측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그것이 지금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당황스럽다”고 밝혔다.
의혹 4 - ‘이종찬 3억 원 제공설’의 진실은 무엇?
10년 만에 다시 불거져 나온 96년 이 전 시장의 선거법위반 폭로 사건에서 지금도 민감하게 남아 있는 문제는 바로 ‘이종찬 3억 원 제공설’이다. 검찰이 96년 10월 김 씨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면서 발표한 내용 가운데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가 김 씨에게 이명박 비리를 폭로하는 대가로 3억 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부분이 논란을 부른 것(박스기사 참조).
당시 이 발표는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검찰 발표 직후 김 씨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억 원 제공설은 검찰에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번복해서 더 큰 의혹을 부추겼다.
지난 21일 2차 기자회견에서 김 씨는 또 새로운 주장을 밝혔다. “당시 3억 원 제공설은 이 전 시장 측이 사주했던 얘기”라는 것. 그는 “내 허위 증언으로 피해를 본 이종찬 당시 부총재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공개 사과했다.
이에 대해 이 전 부총재 측은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피하고 있다. 23일 오전 자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이 전 부총재의 부인 윤장순 씨는 “어제 해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내에서 남편과 함께 관련 신문기사를 읽었다. 남편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진실을 제대로 밝혀 다행이다’라고만 언급했다”고 전했다. 그는 “남편은 이 건으로 인터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미 정계 은퇴한 마당에 괜히 남의 당 내부 문제에 왈가왈부 관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 정치권에서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김 씨는 이와 관련해 그동안 이종찬 측 제안, 검찰 조작, 다시 이종찬 측 제안, 이 전 시장의 사주 등 지금까지 무려 말을 세 차례나 번복했다”며 “김 씨가 폭로 대가를 요구했을 것이고, 여기에 이 전 부총재 측이 응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수사 과정으로 볼 때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고 밝혔다.
반면 여권의 한 인사는 “당시 검찰이 김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진술을 이끌어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당시 검찰의 이 전 시장 기소는 여당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여기에 검찰도 많은 정치적 부담을 느꼈음은 당연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김 씨는 “해외에서 귀국해서 검찰 조사에 응했을 때 검찰에서 난데없이 ‘이종찬 3억 원 제공설’을 들고 나오더라. 아마 사전에 다른 참고인 조사에서 들은 듯했다. 당시 58시간을 잠도 못 자고 조사받는 과정에서 비몽사몽 혹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검찰 주장을 대부분 시인했다. 그 직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검찰의 주장에 응해준 것이다’라고 진실을 밝혔지만, 재판 과정에서 이 당시 의원(이 전 시장) 측이 내게 ‘이 부총재의 3억 원 제공설을 인정해 달라’고 부탁해 그의 요구를 들어줬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이 부총재 측에 ‘해외 유학 계획이 있는데 한 3년 정도 걸릴 것이다. 뒤나 좀 봐달라’고 가볍게 부탁한 적이 있는데 그게 3억 원으로 둔갑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 씨의 계속된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명쾌하게 가시질 않고 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