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열린우리당 신임 원내대표 선출 투표를 하고 있는 당선자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열린우리당의 전체 의원 수는 1백52명. 이 중 이번에 금배지를 처음 단 초선은 1백8명으로 전체의 71%에 달한다. 머리수로만 따지자면 열린우리당은 초선이 지배하는 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문제는 초선들의 숫자가 많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구성이 천차만별인데다,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같은 당 중진이라 해도 자신의 주의·주장과 배치되는 주장을 할 경우 공개적으로 반박하기 일쑤고, 민감한 정책현안에 대해서도 여당 의원이라는 신분과 관계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다반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열린우리당 내에선 4·15 총선 이후 ‘중진 대(對) 초선’ 간에 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진보’ 또는 ‘개혁’을 강조하는 일부 초선 의원들은 몇몇 중진들과 정면충돌까지 빚은 상태다. 중진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뜻하지 않은’ 봉변을 피하기 위해 몇몇 초선 의원들을 ‘블랙 리스트’에 올려 놓고 접촉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물론 1백8명 초선들이 모두 위에서 언급한 성향을 띠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도 보수를 표방하는 전직 관료나 외부 전문가들은 일부 개혁성향 초선들의 행태를 ‘돌출 행동’으로 못마땅해 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당내 이념적 스펙트럼이 초선들 간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며 이는 곧 이념-노선에 따른 소그룹화를 추동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초선 대란(大亂)’이란 얘기까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복잡한 사정을 들춰봤다.
최근 열린우리당 내에선 지난 19일 국회 도서관에서 결성된 모임 하나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다. 문제의 모임은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 26명이 회동해서 결성한 ‘초선 모임’(가칭). 김재홍 임종인 정청래 이인영 당선자 등 당내에서 ‘선명 개혁’을 앞장 서서 강조하는 인사들을 주축으로 한 모임이다.
논란은 회동에 참석한 일부 초선들이 당 지도부와 다선 의원들에 대한 비판 내용이 알려지면서 본격화됐다.
“당이 경기부양으로 보는 관료적 발상에 젖어있다. 이게 과연 개혁정당이냐”(채수찬 의원)며 당 체질에 대한 개선요구 등 긍정적인 지적도 있었지만 “개혁은 1년 안에 이뤄져야 한다. 모르는 게 원동력이 될 수 있다”(양승조 의원), “동급생들끼리 모이면 용기도 나고 때로 힘도 생기고 불손하게 대들 수도 있다”(정청래 의원)는 다소 엉뚱한 발언도 튀어 나왔던 것.
그러나 역시 압권은 ‘골수 진보’를 자처하는 임종인 의원의 독설이었다. 임 의원은 이날 “어떤 재선이 워크숍을 앞두고 ‘군기잡겠다’고 해 모욕을 느꼈다. 의원을 안 해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앞으로 두번 다시 (초선) 군기잡겠다고 하면 그 사람을 물어 뜯어버리겠다”고 말했다.
임 의원이 문제삼은 것은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워크숍(4월26~28일)을 앞두고 당시 원내부대표를 맡고 있던 김부겸 의원(재선)이 일부 기자들에게 “원내 과반 여당으로서 책임이 막중해졌다. 여과되지 않는 초선들의 얘기가 문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내가 ‘군기반장’ 역할을 하겠다”고 한 발언.
최근 신기남 의장 비서실장으로 기용된 김 의원은 임 의원의 ‘험구’에 “허허, 진의가 그게 아닌 것은 (임 의원도) 잘 알 텐데…”라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비당권파 한 중진은 “어쩌다가 초선들이 내놓고 선배들에게 ‘까불면 재미있다’고 협박하는 상황이 됐냐”며 개탄했고, 한 초선 의원도 “선배 의원에 대한 예의에도 어긋날 뿐더러, 품위면에서도 문제가 있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임 의원은 문제의 ‘초선 모임’ 발언 외에도 돌출 언행으로 여러 차례 입방아에 올랐던 인물. 민변 부회장 출신인 그는 벌써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 중 최고의 ‘구설수 메이커’로 등장했다.
‘선명 개혁’을 표방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지도부들도 초선들의 행보가 계속 파장을 불러일으키자 점차 골치 아파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특히 임 의원의 대체복무법 제정 발언에 대해선 그와 같은 민변 출신인 신기남 의장마저 “나도 변호사라면 그러겠지만 당 대표로서는 옳다고 할 수 없다”며 서둘러 선을 긋고 나섰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또 일부 개혁성향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전 경남지사)의 차기 총리 국회 인준에 반대하려는 기류가 조성되고 있는데 대해서도 우려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혁규 총리’ 카드를 강행하려는 움직임에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노동당까지 반대하고 나서 골치가 아픈 마당에 당내에서도 비토(Veto) 조짐이 일자 곤혹스럽게 된 것이다. 한 언론사의 조사에 따르면 열린우리당 의원들 중 ‘김혁규 총리’에 반대하는 의견은 5명, ‘판단 유보’는 무려 21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선 중진들이 대부분 포함된 비당권파들은 일부 초선 의원들의 정제되지 않은 행동을 신기남 의장-천정배 원내대표 등 현 지도부의 ‘방조’에서 비롯됐다며 비판하고 나선 상황.
당내 최다선(6선)인 김원기 최고상임고문은 지난 20일 신기남 의장의 면전에서 “개혁 의지가 강하고 너무 젊어지다 보니 안정과 균형면에서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지도부가 입만 열면 개혁을 부르짖다 보니 당내외적으로 불필요한 불안감과 섣부른 ‘개혁 만능주의’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라 하겠다.
재야파의 한 재선 의원은 “신 의장과 천 대표가 언론개혁을 시급한 개혁과제로 설정한 것을 계기로 과거 ‘안티 조선’운동 등 극단적인 행태를 보였던 J 의원 등 일부 초선들의 행동반경이 점차 커지고 있는 데 주목하고 있다. 찬반 양론이 일고 있는 언론개혁을 충분한 공감대 없이 과격한 전력을 가진 초선들을 앞세워 추진할 경우 정당성과 순수성을 의심받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일부 초선들의 행태가 우려스러운 것은 이들이 출신과 성향에 따라 계파를 형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다, 주요 현안에 대해 의견수렴 과정 없이 자신들의 견해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국회가 개원하면 이라크 파병이나 언론-사법개혁, 국가보안법 폐지 등 민감한 현안이 줄을 이을텐데 이들이 세력화해 중구난방식으로 주장을 펼칠 경우 자칫 수습불능의 단계에 이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주목되는 것은 이같은 당내외 우려에 공감하며 또다른 세력화가 초선 의원들 사이에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와 정부에서 몸을 담고 있다가 정치권에 들어온 인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이러한 흐름에는 노 대통령 직계그룹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의원 등 청와대 출신 386그룹의 경우 최근 당내에서 개혁 논의가 불필요한 내부 논란으로 흐르거나 소모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데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공동보조를 취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 중 이 의원은 “지금은 좌(左)냐 우(右)냐, 진보냐 보수냐보다는 실용 노선을 가는 것이 중요하며 개혁을 실천하되 실용주의적 노선을 철저히 가져야 한다. 개혁을 자꾸 이념적으로 생각하는데, 개혁은 경쟁력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게 핵심이다”는 주장을 펴 일부 개혁 초선들의 ‘개혁 만능주의’ 주장에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 386그룹들은 우선 상대적으로 이념적 지향을 뚜렷이 내세우지 않는 김진표(전 경제부총리) 이근식(전 행자부 장관) 안병엽(전 정통부 장관) 변재일(전 정통부 차관) 강길부(전 건교부 차관) 권선택 의원(전 청와대 인사비서관) 등 다른 초선의원들과 손잡고 당권파와는 다른 차원의 실용주의 노선을 모색할 것이란 예상을 낳고 있다. 아울러 청와대 출신인 문희상(전 비서실장) 유인태(전 정무수석) 등 다선 그룹들과도 호흡을 맞춰 가급적 정치색을 띠지 않으면서 당내 계파간 선수간 갈등을 조정하는 균형추 역할을 할 것이란 분석을 낳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