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과 생존 기로에서 ‘곪은 게 터졌다’
▲ 정태기 전 대표이사 | ||
발단은 1월 30일 임원회의였다. 정태기 사장은 이 회의에서 돌연 사의를 밝혔다. 내세운 이유는 ‘건강 악화’.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었다. 일부 임원들과 편집국 간부들이 나서 만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편집국에 대한 평소의 불만을 토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 사장은 회사의 재정 상태는 꽤 호전됐으며 이제는 신문의 품질이 관건이라고 봤다. 이른바 ‘고급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신문은 자신의 기대만큼 나오지 못했으며 지금 편집국의 상태로서는 개선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내가 물러나면 전체 조직이 긴장하는 계기가 돼 신문에 올인하게 될 것”이라는 게 사의에 깔린 정 사장의 의도였다.
그러나 정 사장은 주위의 설득을 받아들여 2월 5일 열린 이사회에서 사의를 번복했다. “간부들이 적극적인 자발성을 보였다. 간곡한 의지표명도 있었다. 이제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펼쳐보자”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오귀환 편집국장을 포함한 임원들은 모두 보직사퇴서를 제출했다. 대표이사가 사의를 표명했던 마당에 임원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정 사장은 다른 임원들의 사퇴서는 처리를 유보했으나 오 국장의 사퇴서만은 수리하고 이날 오후 6시, 곽병찬 편집국장 후보의 임명동의를 요청했다.
사태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편집국 기자들의 충격은 컸다. 5일은 월요일이어서 본사에 기자들이 가장 많은 날이었다. 출입처에 나가있는 기자들도 회의를 위해 대부분 귀사하기 때문이다. 공고를 본 기자들은 당황했다. 한 기자는 “패닉 상태였다”고 표현했다.
정 사장은 6일 가진 월례회의에서 편집국장 교체 이유를 질문받자 “오귀환 편집국장이 이사회가 끝난 뒤 찾아와 ‘편집국장의 책임이 크다’고 명백한 의사표시를 했다”고 밝혔다. <한겨레> 편집국장은 대표이사가 지명한 뒤, 편집국의 추인을 받는 임명동의제에 따라 임명된다. 논설위원이던 곽 후보는 정 사장이 사의를 표명하자 “책임을 함께하겠다”며 적극 말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편집국 내에는 국장 교체의 진짜 배경은 대표이사와 편집국장 사이의 잦은 의견 대립이었으며 “형식은 교체지만 사실상의 경질”이라는 분석이 많다.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정 사장이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주말판’에 대해서 오 국장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신중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월 금속노조 의견광고 거부 사건에 따른 젊은 기자들의 성명 등 단체행동에 대해서도 입장이 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기자협회 한겨레지회(회장 김동훈)와 <한겨레> 노동조합·우리사주조합(겸임조합 위원장 이재성)은 성명과 호외를 내고 사장을 비판했다. 한겨레지회는 ‘대표이사의 책임과 성찰을 촉구한다’는 성명에서 “2년 동안 편집국장을 두 번째 바꾸는 것은 인사권자인 대표이사의 인사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라며 “훌륭한 사장이나 국장보다 앞서는 것은 바른 제도와 기풍임을 거듭 확인한다”고 주장했다. 겸임조합도 조합신문인 <한소리>. 호외에서 “이번 사태의 핵심은 민주주의이며 이번 사태 앞에서 <한겨레> 구성원들이 분노하는 이유”라며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 이를 해결할 대안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다”라고 밝혔다. 회사의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일었다. 대표이사가 새롭게 의지를 다졌으니 회사의 안정을 위해 호응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논란이 계속되면서 곽병찬 편집국장 후보에 대한 임명동의 투표는 사장에 대한 신임 투표 성격을 갖게 됐다. 정 사장은 6일 월례회의에서 “결정은 여러분(편집국 기자)들에게 달려있다. 의견을 달라. 나는 거기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곽 후보는 8일 편집국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임명동의 투표가 대표이사 신임 투표의 성격을 갖게 된 데 대해 “주요한 정책인데 회사의 신임이 안 걸릴 수 없다”고 답변했다.
12일 신임 편집국장 후보 임명동의 투표는 결국 부결됐다. 찬성 73표, 반대 72표였다. 투표자의 과반수인 76표를 넘지 못했다. 투표율도 76.1%에 그쳤다. 다음날 정태기 사장은 이 결과에 따라 임원회의에서 사의를 밝혔다. 부결 결과를 놓고 한겨레 사내 게시판에서는 치열한 갑론을박이 뒤따랐다. 어찌됐든 이제 한겨레는 새 대표이사를 뽑기 위한 선거 국면에 들어섰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를 맞아 한겨레는 혼란에 빠졌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한겨레는 그동안 크게 두 개의 암초와 사투를 벌여왔다. 하나는 내부의 갈등, 또 하나는 경영난이다. 창간 때부터 계속돼온 계파 구도가 구성원 사이에 불신을 쌓았다. 최근에는 세대별 대립의 양상까지 나타났다. 2004년에는 사장의 직무가 정지되고 비상경영위원회가 꾸려져 80명의 사원이 회사를 떠나야했을 정도로 심각한 경영 위기에 봉착한 바 있다. 지난해에도 17명의 기자들이 회사를 등졌다. 여기에 경쟁지들과의 싸움에서 점점 뒤쳐진다는 위기감도 회사를 짓눌렀다. 최근에는 “한겨레가 진정 진보언론인가”라는 신문의 정체성 논쟁까지 불붙었다. 이런 위기의 불씨들이 편집국장 전격교체라는 우발 사태를 통해 일거에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폭발했다는 것이다.
한 고위 간부는 “한겨레는 통합과 생존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구성원 사이 갈등이 부른 분열은 임계점에 이르렀다. 통합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가 됐다. 지난해 사상 최대인 45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경영도 여전히 불안하다. 안정된 수익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경영이 시급하다. 다가오는 신임 대표이사 선거에서도 화두는 ‘통합과 생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누가 어떤 대안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유권자들의 선택이 달라지는 것이다.
6만여 명의 국민주주들이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주머니를 털어 만든 초유의 신문사 <한겨레>. ‘민주화 이후의 시대’와 ‘신문산업의 위기’라는 변화된 정치·경제적 조건에서 한겨레가 갈 길은 무엇일까. <한겨레> 구성원과 독자들은 3월 9일 대표이사 선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장우성 기자협회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