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한 야인 ‘다른 뜻’ 품었나
▲ 송광수 전 검찰총장 | ||
‘정말 그랬을까.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
송광수 전 검찰총장의 ‘깜짝 발언’으로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참여 정부 초대 검찰 수장으로 지난 2003년 대선자금 수사를 총지휘했던 송 전 총장이 마치 작심이라도 한 듯 대통령과 현 정부가 민감하게 받아들일 만한 비화를 ‘거침없이’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송 전 총장이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노 대통령 측 정치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었고, 대통령 측근 수사 당시 대검 중수부 폐지를 놓고 검찰과 청와대가 심한 마찰을 빚었던 점에 대해 언급한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5년 퇴임 때 송 전 총장은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외압이 있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밝힌 바 있다. 사석에서는 한나라당과 노 대통령 측 정치자금 액수를 100 대 20으로 비교하면서 언론이 계산을 잘못했다는 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진다.
중수부 폐지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내 목부터 쳐라”며 대놓고 반발했던 것도 송 전 총장이다. 이렇듯 검찰총장 재직 전후로 전개되어온 정황만을 보자면 이번 발언도 그 흐름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자리도 아닌 대학생들의 특강 자리에서 노 대통령 측의 불법 정치자금 규모와 특정 사건을 지칭하면서까지 청와대와 빚은 갈등에 대해 구체적이고 강한 어조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이번만큼은 내용의 진위는 물론 발언의 의도 역시 상당히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일단 청와대와 법조계 그리고 검찰 내부에서까지 송 전 총장의 발언 자체에 약간 무리가 있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청와대는 송 전 총장 발언을 무척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10분의 2, 3’ 발언과 ‘중수부 폐지 압력’ 발언에 조목조목 반론을 들며 모두 “근거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배신감’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수사에 최대한의 독립성을 보장, 정치 관련 수사의 모범으로 꼽히는 결과를 얻었음에도 이에 대해 수사 총책임자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대선자금 수사에 관여했던 검찰 인사들 중에는 ‘10분의 1’ 초과 여부에 대한 논란에서만큼은 송 전 총장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송 전 총장이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개개인이 받은 액수만 발표했을 뿐 어느 선까지 정치자금으로 볼 것이냐는 기준 자체가 모호해 전체 자금의 규모는 내부적으로 집계하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입장. 언론이 자체적으로 개별적인 수사 결과를 합산, ‘10분의 1’이 넘은 사실이 언급됐다는 것이다.
송 전 총장 발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검찰이 엄정하게 수사한 사건을 당시 수사 최고 책임자였던 전직 검찰 총수가 다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에 송 전 총장도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강조하다 보니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일단은 스스로 파문을 진화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등 일부 정치권이 송 전 총장 발언을 계기로 노 대통령의 불법 정치자금 액수 논란과 중수부 폐지 압력 문제를 쟁점화시키는 등 후폭풍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송 전 총장을 잘 아는 법조계 인사들도 이번 발언 파문을 단순 해프닝 정도로 가볍게 여길 사안은 아니라는 반응이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 한 인사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대검 중수부 폐지는 노무현 정부의 큰 목표 중 하나였고, 실제 최근 법무부와 검찰의 일부 인사가 이러한 목적하에 이뤄진 측면도 있다”고 전제하면서 “검찰을 떠나 야인 신분인 송 전 총장이 대뜸 현 정부에서 청와대와 검찰의 갈등 문제를 꺼낸 것은 다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다른 한 법조인 역시 송 전 총장의 성격을 예로 들면서 대학 강의에서 모호한 사실 관계를 우발적으로 발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 법조인은 “일례로 송 전 총장의 바둑 실력은 아마 1급 수준인데 한 수를 두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려 상대방이 지치다 못해 돌을 던지는 일도 다반사다. 송 전 총장의 모든 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장고를 거듭하는 송 전 총장의 성격으로 보아 단순한 판단으로 ‘10분의 2, 3’이나 대통령 측근으로부터 수사 외압을 받았다는 식의 폭로성 발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송 전 총장과 막역한 또 다른 법조인도 “송 전 총장이 매우 구체적으로 문제 제기를 한 것을 보면 본인 스스로 발언하고자 한 내용과 그 의도에 어떠한 ‘확신’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법조인은 “송 전 총장은 송두율 교수 사건 당시 법무연수원을 찾아 연수원생 48명을 모아놓고 눈을 감게 한 뒤 송 교수를 구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수원생은 손을 들게 했는데 당시 46명이 손을 들자 그때서야 최종적으로 마음을 굳혔을 정도로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분명 송 전 총장은 대학 특강 발언 파문이 불거진 이후 검찰 독립성과 중립성을 강조하다보니 세부적인 사실 관계 표현에 오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해명했다. 그러나 송 전 총장을 잘 아는 법조인들은 오히려 이 같은 해명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송 전 총장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가 심상치 않게 다가오는 이유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