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세 불리고 밖으로 ‘독립전쟁’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이완구 원내대표, 김무성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추석연휴 기간 정치권에선 김무성 대표 발언이 단연 ‘톱뉴스’였다. 김 대표는 7일 보도된 <중앙선데이> 인터뷰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 행적과 관련) 유언비어가 퍼진 것은 국회에서 답변을 잘못한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꼬집었다.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이 사고 당일 분 단위로 어떻게 움직였다고 밝혔으면 됐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문제가 커진 것 아니냐. 비서실장이 열 번이라도 국회에 나와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선 김 대표 인터뷰가 공개된 시점에 주목했다. 연휴를 앞두고 김 대표가 의도적으로 김 실장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는 것이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추석과 설 명절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집권당 대표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향해 한마디 했다는 뉴스는 연휴 내내 화제를 모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김 대표가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고 말했다. 한 핵심 친박 의원은 김 대표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비보도를 요청하며 “대통령 동선을 분 단위로 밝히라는 김 대표 주장이 상식적인지 묻고 싶다. 대권에 눈이 멀어 오버한 것”이라며 날선 답을 내놓기도 했다.
사실 김 대표가 지난 7·14 전당대회에서 서청원 최고위원과 접전을 벌일 것이란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엔 김 실장 공(?)이 컸다. 김 대표는 전당대회 기간 동안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는 구호를 내세워 표심을 공략했다. 이는 ‘부통령’으로 불리며 청와대는 물론 당의 주요 사안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김 실장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김 대표는 연이은 ‘인사 참극’에 대한 김 실장 책임론을 집중 부각시키며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웠고, 이는 전당대회 대승으로 이어졌다.
김 대표는 취임하자마자 김 실장을 세월호 국정조사 증인으로 채택할 수 있다며 청와대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당시 정치권에선 국정 주도권을 놓고 김 대표를 정점으로 한 비박계와 친박계가 정면충돌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청와대와의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보였던 김 대표가 한 발 물러선 듯한 자세를 취했다. 대신 김 대표는 민생 행보와 친정체제 구축에 주력했다. 여야가 뜨겁게 공방을 벌였던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서도 김 대표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으며 거리를 뒀다.
이를 두고 정치권과 사정당국 주변에선 청와대가 김 대표 견제에 나섰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공교롭게도 김 대표가 정치 현안에 대해 말을 아끼기 시작할 무렵인 6월 중순 제기됐던 김 대표 딸 특혜 임용 의혹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한 시민단체의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도 이 건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김 대표를 껄끄러워하는 여권 핵심부가 관여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실제로 김 대표가 정중동 모드로 선회하자 이러한 추측은 더욱 설득력을 얻으며 확산됐다.
이에 대해 김 대표 측은 “오해일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딸 문제는 이미 김 대표가 직접 해명을 했고, 검찰 수사도 언제든 응할 것이란 입장이다. 또 김 대표 스탠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당 내 역학구도와 연관 지어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김무성계’로 분류되는 한 초선 의원은 “김 대표가 큰 표 차로 승리하긴 했지만 여전히 당내 주류는 친박이다. 정치권에선 김 대표가 친박에 둘러싸여서 제대로 일을 못할 것이란 비관론이 파다했다. 김 대표가 섣불리 나설 수 없었던 배경”이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김 대표가 취임 초반 내실을 다지는데 공을 들였던 정황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당 살림을 도맡는 사무총장에 측근인 이군현 의원을 발탁했다. 이밖에 당 요직에 ‘김무성 사람’이 대거 포진됐다. 9월 4일 치러진 새누리당 중앙청년위원장 선거에서도 김 대표와 가까운 김의범 경기도의원이 1위를 차지했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청년위원회를 김 대표가 장악했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청년위원회는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고 분위기를 띄우는데, 김 대표로선 든든한 우군을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입지가 공고해지자 김 대표 역시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타깃은 김 실장이었다. 김 대표는 8월 22일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참여한 뒤 다음 주자로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과 함께 김 실장을 지목하면서 “김 실장은 너무 경직돼 있다. 찬물 맞고 유연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당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말 속에 뼈가 있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지난 1일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김 실장과 소통하다보니 경직됐다고 느껴 한 말”이라고 밝혔다.
8월 24일 새누리당 연찬회에서도 김 대표는 김 실장을 향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 대표는 “정기국회 연찬회는 당·정·청 연찬회다. 장관과 청와대 해당 수석들이 다 왔다. 비서실장이 왜 안 왔는가에 대해서는 한번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 실장이 연찬회에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다. 당시 연찬회에 참석했던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비서실장이 연찬회에 온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김 대표가 그런 말을 해서 조금은 의아스럽긴 했다. 김 대표가 의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김 실장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사라진 7시간’ 의혹에 기름을 끼얹은 김기춘 비서실장의 특위 답변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그러나 이는 ‘몸 풀기’에 지나지 않았다. 김 대표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터뷰를 통해 직접 김 실장을 정조준했다. 더군다나 박 대통령의 이른바 ‘7시간 미스터리(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 7시간 동안의 일정)’에 대해 청와대가 직접 해명에 나서는 등 수습 국면에 접어든 시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 대표 발언은 도발에 가까웠다. 김 실장은 김 대표 인터뷰가 보도되기 전 <신동아>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은 영내에 있었다. 거듭된 의혹 제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청와대와 친박이 불쾌해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김 실장이 이례적으로 인터뷰까지 하며 진화에 나섰는데 집권당 대표라는 사람이 또 다시 총구를 들이댔다.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김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김 실장과 계속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얘기였다. 정치권 일각에선 김 대표가 최근 하락하고 있는 지지율 반등 전략으로 김 실장을 공격하고 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친박 인사들은 ‘실력행사’를 통해 김 대표와의 일전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기엔 이대로 밀리다간 당을 김 대표에게 통째로 내주고 말 것이란 우려가 담겨 있다. 친박계의 한 중진급 의원은 “김 대표의 대권 레이스는 이미 시작됐다고 본다. 2016년 총선 때 친박 공천 학살이 이뤄질 게 분명하다. 우리라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않느냐”면서 “당 대표를 내주긴 했지만 이완구 원내대표를 비롯해 서청원·이정현 최고위원 등 친박은 여전히 건재하다. 특히 이 원내대표의 역할이 중요하다. 청와대의 김 실장과 이 원내대표가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해서 김 대표를 협공하면 뺏겼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대표 역시 세 불리기를 통해 수성에 나섰다. 김 대표가 주도하는 당내 최대 모임 ‘통일경제교실’이 9월 16일부터 재개된다. 의원들과의 스킨십을 강화해 당내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무성계의 또 다른 한 재선 의원은 “김 대표는 청와대와 당이 국정을 이끌어가는 수레바퀴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김 실장에게 쓴 소리를 하는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는데 저쪽(친박)에서 자꾸 오해를 하는 것 같다”면서 “김 대표로선 세를 최대한 확장해 대세론을 생산해내는 방법밖엔 없을 듯하다. 그렇게 되면 집권당 대표에다가 유력 차기 대권주자인 그를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