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기 낙마하자 청와대 웃고 한나라 발끈?
▲ 홍영기 전 서울경찰청장(위 왼쪽), 최기문 전 경찰청장, 허준영 전 경찰청장(아래 왼쪽), 이택순 경찰청장. | ||
#2. 지난 5월 25일 오전, 서울경찰청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홍영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이 한화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사건의 수사 은폐 의혹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를 발표했기 때문. 서울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정말 뜻밖의 일이 터졌다. 다들 홍 청장이 차기 정권의 첫 경찰청장이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김 회장 보복폭행 사건이 경찰청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데 이어 최근에는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정쟁 다툼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그 내막에는 대선도 포함되어 있다. 경찰청 주변에서는 ‘차기 정권의 초대 경찰 총수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권의 헤게모니 다툼’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으로 현재 경찰 수뇌부는 만신창이가 됐다. 경찰 내 2인자 격인 홍영기 전 서울청장이 눈물을 쏟으며 도중하차했다. 그와 접촉했던, 경찰 내에서 존경받던 전직 경찰 총수는 졸지에 경찰을 망가뜨린 원흉이 됐다. 현직 경찰 총수는 여전히 의혹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현재의 시각은 김 회장 사건을 축소, 은폐토록 한 경찰의 최고 윗선이 누군지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책임 공방 차원에 그칠 수도 있을 이번 파장에 대해 경찰 주변과 정치권 일각에서 최근 색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그것은 차기 경찰 총수 인선까지를 감안한 노무현 정권과 한나라당의 경찰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의 양상이라는 것. 오는 12월의 17대 대선의 기선 제압용 다툼이 이미 촉발됐고, 그 와중에 홍 전 서울청장이 덫에 걸려 희생됐다는 동정론도 흘러나오고 있다. 그 실체를 추적해보자.
2005년 12월 여의도 농민집회 사망 사건의 책임을 지고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이 결국 사퇴를 하자 현 정권의 마지막 경찰 수장이 될 차기 경찰청장을 놓고 하마평이 무성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힌 이는 최광식 당시 경찰청 차장이었다. 호남 출신으로 추진력이 강하고 경찰 내 신망이 두터웠던 그는 무엇보다 두 전직 총수들과 각별했다.
최기문 전 청장은 2003년 3월 자신의 취임 후 첫 인사안에서 당시 경무관이던 최 전 차장을 치안감 보직인 경찰청 수사국장에 임명했다가 청와대의 반대로 제동이 걸린 적이 있을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최 전 차장은 허 전 청장의 서울청장 시절 서울청 차장으로서 보필한 데 이어 청장 시절에도 역시 본청 차장으로 2년간 직속 상사로 모셨다.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허 청장이 임기를 다 하면 최 차장이 승계할 것”이란 얘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윤상림 로비 의혹이 경찰을 덮쳤고, 불행히도 최 전 차장은 그 덫에 걸려 낙마하고 말았다. 농민 집회와 윤 씨 로비 의혹으로 지난해 1월 졸지에 경찰청장과 차장, 서울청장 등 최고 서열 3인방의 줄사퇴가 이어지면서 차기 총수는 이택순 경기경찰청장 몫으로 돌아갔다. 경찰 주변에서는 “지독히도 운이 좋았다”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런 면에서 지난해 12월 단행된 치안정감 인사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홍영기 당시 전남청장이 치안정감으로 승진하면서 곧바로 서열 2위격인 서울청장에 발탁됐기 때문. 최 전 차장의 낙마로 인해 그는 일약 호남 출신의 선두주자가 됐다. 당초 서울청장이 유력시됐던 어청수 경기청장은 경찰대학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데 그쳤다. 이때부터 ‘포스트 이택순’을 놓고 ‘홍영기냐, 어청수냐’하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이번에 홍 전 서울청장이 사퇴하자 그 후임에 어 학장이 신임 서울청장으로 지명됐다.
지난해 말부터 정치권과 경찰 일각에서는 이 청장이 임기 전 전격 사퇴하고 어 서울청장이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 경찰 총수가 될 것이란 설이 무성했다. 어 서울청장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현 정권에서 경찰 총수의 필수 코스로 통하는 청와대 치안비서관을 지냈다. 노 정권의 신임도 두텁다는 평이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도 없이 임기제 청장을 세 번이나 연속 도중하차시킨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 탓인지 이 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이번에는 차기에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그 첫 총수로 홍 전 서울청장이 발탁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역 안배 차원에서라도 호남 출신 인사가 바람직한 데다 오히려 현 정권에서 치안비서관을 지낸 어 서울청장의 경력이 새 정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또 홍 전 서울청장 뒤에는 최 전 청장과 허 전 청장이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자연스럽게 홍 전 서울청장은 차기 정권의 경찰 총수 1순위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홍 전 서울청장은 최 전 청장과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 전 청장의 발탁에 의해 2004년 1월 경찰청 혁신기획단장으로 임명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검경수사권조정’의 경찰 대표로도 나섰다. 검경수사권조정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허 전 청장 시절 그는 치안감으로 승진해 허 청장 밑에서 경무기획국장을 지냈다.
이런 가운데서 경찰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가 내놓은 한화 로비 실체 시나리오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현 정권에서 경찰 총수를 지냈지만, 최 전 청장이나 허 전 청장은 이미 한나라당 쪽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은 대선정국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확정되면 캠프에 영입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가운데서 차기 정권의 총수 가능성이 점쳐지는 홍 서울청장이 최 전 청장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실제 이택순 청장은 최 전 청장의 ‘로비 인맥’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평소 그의 성격으로 봐서 소극적인 방조를 했을 가능성은 있을 수 있지만…. 최 전 청장 역시 자존심이 강한 성격상 이 청장에게 적극적으로 부탁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두 사람이 52년생 동갑에 행시 18회 동기여서 친하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두 사람은 현역 시절 서열 차이가 현격했다. 감히 친구가 될 사이가 아니었다. 동기 두 사람 중 한 명은 상관이고, 한 명은 부하라면 그 두 사람이 친할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두 사람은 서로 아주 껄끄러운 관계였다. 차라리 최 전 청장과 허 전 청장은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할 수도 있지만 이 청장은 두 사람과 대화가 통하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한화에 적을 두고 있는 이상 최 전 청장도 재벌 총수가 관련된 사건을 모른 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홍 전 서울청장도 최 전 청장의 입장을 고려치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최 전 청장이 한화 고문이었다는 자체가 불행의 씨앗이었다. 따라서 이들과 다소 대척점에 있는 이 청장으로선 ‘내가 왜 이들의 로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하느냐’는 항변을 할 만하다”고 밝혔다.
실제 최 전 청장과 이 청장의 경력을 살펴보면 이 관계자의 설명이 납득이 간다. 최 전 청장은 처음부터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며 95년 경무관, 99년 1월 치안감, 2000년 12월 치안정감(경찰청 차장)으로 승진했다. 반면 이 청장이 경무관이 된 것은 99년 11월로 최 전 청장의 치안감 승진보다 오히려 늦었다. 그는 최 전 청장이 경찰 총수로 취임했을 때 비로소 치안감(경남경찰청장)으로 승진했다. 경찰 내에서 총수인 치안총감과 치안감의 차이는 검찰에 비교하면 검찰총장과 일선 지검장만큼이나 격차가 크다. 두 계급이나 아래였던 셈이다.
일각에서는 허 전 청장도 이번 사태에 등장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허 전 청장 역시 52년생으로 공교롭게도 전·현직 총수 세 사람이 모두 동갑이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허 전 청장은 99년 경북경찰청 차장으로 발령 나면서 당시 경북청장이던 최 전 청장을 1년간 보필했다. 같은 TK 출신인 두 사람은 성격은 다소 달랐지만 의외로 조화를 잘 맞췄다고 한다. 최 전 청장이 사퇴할 당시 일각에서는 후임인 허 전 청장과의 갈등설도 제기됐지만 사실과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두 사람의 행보는 오히려 밀착돼 있다. 최 전 청장은 퇴임 직후 국회의원 재선거와 지방선거 때마다 고향인 경북에서 열린우리당의 후보 출마설이 나돌 정도로 노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지난해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는 지난해 초 청장을 사퇴한 뒤 7월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한 허 전 청장의 행보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이다.
두 사람은 지난해 9월 11일의 전직 경찰 총수의 ‘작통권 환수 반대’ 성명에 나란히 참여했다. 이들은 사학법 개정과 과거사 진상 규명 등에도 반대하는 등 한나라당과 목소리를 같이하면서 현 정권에 뚜렷한 ‘반기’를 들었다. 허 전 청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표지’에 5월 26일자로 ‘열받음. 통탄할 일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새겨놓고 있다. 하지만 허 전 청장은 “내 전임과 후임 청장이 관련된 일이어서 인터뷰하기 곤란하다”는 입장만 밝혔다. 그는 “나는 김 회장과는 일면식도 없다”며 항간의 의혹을 일축하기도 했다. ‘허 전 청장이 최 전 청장을 김승연 회장에게 소개시켜 주었다더라’는 언론계 일각의 소문에 대한 그의 ‘답변’인 셈이다.
정치권과 경찰 주변에서는 “이번 사건은 당연히 이 청장도 알았을 것이고, 또한 재벌회장이 연관된 폭행사건이라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볼 때 청와대 치안비서관에게도 분명히 보고가 됐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청와대가 “이 청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이 청장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계획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홍 서울청장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사퇴시킨 것에 대해 어떤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의심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 청장 사퇴’라는 점은 맞다”고 시인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이 청장은 우선 신망을 잃었다. 또한 정권의 보호를 받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다가올 대선에서 경찰의 중립성이 엄중히 요구되는데 현 정권과 임기를 같이하게 될 이 청장에게는 그런 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2002년 대선에서 뼈아픈 패배를 경험한 한나라당이 경찰 수뇌부의 역학구도에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느낌이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