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열리면 박근혜는 사라진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관훈토론회에서 개헌을 언급하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개헌은 대통령제 권력구도를 바꾸는 대대적인 헌법 개정으로 주로 정권 말기에 정국 쇄신용으로 사용돼온 카드다. 김무성 대표와 가까운 친이계 인사들도 이번에 지도부와 혁신위에 배치되면서 개헌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친박계 인사들의 반발과 친이계 대권주자인 김문수 혁신위원장도 개헌 시기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당내 갈등 조짐이 일고 있다. 결국 공은 차기 대권주자로서 친이·친박계를 모두 끌어안아야할 김무성 대표에게 넘어갔다. 김 대표는 ‘개헌 카드’를 어떻게 사용할까.
9월 24일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한 이재오 의원이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여당에서 개헌 이슈는 ‘전도사’ 이재오 의원을 필두로 친이계 의원들의 숙원이었다. 친이계 정의화 의원이 국회의장에 오르면서부터 국회에서는 친이계가 추진해온 국회선진화법 개정과 개헌 논의에 힘이 실릴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이와 맞물려 친이계와 가까운 김무성 의원이 새누리당 대표가 되면서 친이계 의원들이 전면에 나서 개헌을 요구하고 있다.
개헌 이슈는 김무성 대표가 지난 8월 20일 관훈토론회에서 “세월호 정국 끝나면 논의할 것”이라고 밝히면서부터 급물살을 탔다. 개헌이 여야 합의는 물론 헌법 전반적인 부분을 논의해야 되기 때문에 다음 대선 전에 개헌을 마무리하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것이 김 대표와 개헌론자들의 주장이다.
친박계 의원들은 개헌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시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대통령이 진행하고 있는 각종 경제·민생 법안이 개헌 정국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친박계 중진의원은 “개헌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시기상조다. 정부가 경제 문제에 치중해야할 판에 개헌까지 하면 되겠나. 당에서 한다고 해도 내가 나서서 반대할 것”이라며 “당에서 반대하는 의원도 다수다. 게다가 당대표가 개헌 시기를 직접 언급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며 불만을 털어놨다. 이정현 최고위원도 한 방송에서 “(개헌) 필요성은 있지만 지금은 시점이 아니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새누리 중앙당에서도 개헌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있었지만 현재 논의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새누리당 당직자는 “최고 권력이 개헌을 추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아래 권력이 추진하는 것은 위의 권력에게 도전하는 셈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며 “혹시라도 개헌 정국으로 들어간다면 모든 이슈가 개헌에 매몰돼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무성 대표가 8월 20일 관훈토론회에서 개헌을 언급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은숙 기자
실효성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국회에서도 개헌을 주장하는 이재오 조해진 의원 등이 여야 개헌추진의원모임이 150여 명에 달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개헌의 시기적인 공감대 형성은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중도 성향의 새누리당 초선 의원은 “개헌 요구가 있지만 앞으로 모임 일정은 나오지 않았다. 연구모임으로 토론 같은 것은 많이 했는데 시기적인 문제는 논의된 것이 없다”며 “150명 의원 모두 꾸준히 참석한 것도 아니다. 가입만 해놓고 나오지 않는 의원들도 꽤 있다”고 설명했다.
한 새정치민주연합 고위 당직자도 새누리당의 개헌 논의에 대해 “시기적으로 개헌을 지금 하는 것이 맞다. 여야 합의가 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개헌을 하게 되면 대통령제뿐 아니라 헌법 전체를 고쳐야 한다. 개헌 발의에 야당이 힘을 실어준다면 통과될 수 있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그런데 여당 입장에서는 개헌 정국이 되면 대통령의 존재감은 사라진다. 지금 여당에서는 권력싸움 용도로 개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도 실효성이 부족한 개헌 카드가 결국 대권주자들의 판 흔들기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개헌이 여야 정치권에서 논의가 돼야 하고 나라의 기본 틀을 바꾸는 것이기에 간단치 않다. 대통령제도 입법부의 견제를 받아 완벽한 독재라고 볼 수도 없고 우리나라가 지금 한계에 이르렀는가 하는 근본적 고민이 필요하다”며 “논의 자체가 개헌 정국으로 가는 것이기에 정권 2년차에 나올 만한 얘기도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시행이 어렵다. 정치인들의 개헌 이슈는 일단 던져놓고 판을 흔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금까지 개헌 카드는 주로 정국 쇄신용으로 대통령이 추진해온 것에 비해 이번 개헌 논의는 여당 대표로부터 본격화됐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정치권에서는 아직 프레임 설정을 하지 못한 김무성 대표가 개헌 프레임으로 박근혜 정권과 차별화를 두려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김 대표가 주로 비박계 인물들로 혁신위원회를 구성시키고 김문수 나경원 원희룡 등 차기 대권주자들을 속속 ‘무대’로 불러올리면서 박근혜 정권을 압박하는 진영을 구축했다는 평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위원회에서 개헌 추진 가능성도 거론됐지만 친이계 대권주자인 김문수 혁신위원장이 “개헌은 시기상조”라고 선을 그으면서 개헌 카드는 안개에 싸이게 됐다.
이 때문에 개헌이 앞으로도 친박과 비박 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로 여겨지고 있다. 전당대회 이후 김무성 대표로 당권이 바뀌면서 친박 인사들의 입지가 좁아졌지만 친박 핵심으로 분류되는 이완구 원내대표와 이정현 최고위원, 홍문종 의원 등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아직 공식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지 않은 서청원 최고위원도 지도부에서 언제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다.
김다영 기자 lata13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