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걸린 사람한테 소염제만 처방’
하지만 르노삼성 측의 얘기는 다르다. 이번 리콜을 통해 시동 꺼짐 현상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거론하는 문제점은 구조적 결함이 아니라 개별적인 차량의 문제라는 얘기다.
리콜 결정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과 르노삼성 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번 사태의 앞과 뒤를 다시 들여다봤다.
사실 이번 리콜은 소비자들의 힘이 컸다. 치밀하고 조직적인 활동으로 결국 건교부의 리콜 결정을 얻어낸 셈이다. 사연은 이렇다.
SM5를 구입한 상당수 사람들이 차에서 심한 진동을 느꼈다. 이들은 이 문제로 해당 자동차 회사의 AS(애프터서비스)센터를 찾았다. 그런데 센터에서는 “진동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답했다. 서울에 사는 곽병학 씨(31)도 그런 소비자 중 하나였다. 곽 씨는 AS센터 관계자의 말을 듣고 황당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기어를 D 모드에 두면 차가 4WD 차량처럼 떨리는 거다. 그나마 4WD 차량은 핸들하고 대시보드 정도만 떨리는데 내 차는 운전석 전체가 떨렸다. 이런 차를 타다 가끔 다른 동급의 승용차를 타면 고급 외제차를 탄 느낌이었다. 그런데 AS센터에서는 진동이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하니…. 더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르노삼성 본사에 문의하면 ‘우리 차는 완벽해서 진동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곽 씨는 이런 문제를 느끼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주행 중에 시동이 꺼지는 경험을 한 사람도 여럿 된다는 점. 이들과 함께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하자 회원 수는 두 달 만에 2000명으로 늘어났다. 피해 사례도 심각했다. 고속도로에서 시동이 꺼져 큰 사고를 당할 뻔한 사람도 있었고 갑자기 엔진 쪽에서 연기가 난 차량도 있었다.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은 조직적으로 르노삼성에 문제 제기를 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처음에는 소비자의 차량관리 부실로 떠넘기던 르노삼성 측은 피해 건수가 많아지고 항의가 늘어나자 철저하게 ‘무대응’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차량에 문제가 있으면 AS를 받아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는 것. 하지만 AS를 받아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한 달 동안 서너 번씩 차를 센터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지경이 되자 소비자들은 건교부에 민원을 제기했다. 진동과 시동 꺼짐 문제로 차량 리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소비자들의 문제 제기는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시동 꺼짐 문제만 리콜 대상으로 결정됐다. 시동 꺼짐은 운전자의 생명과 직결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건교부의 자동차 리콜 담당인 권인식 씨는 “정부의 리콜 결정은 안전과 환경 문제에 국한되며 진동은 차량의 품질 문제이지 법에 저촉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리콜 대상이 아니다”고 전했다.
결국 차량의 심각한 결함에 대해 부정하던 르노삼성은 건교부의 리콜 결정을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차량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한 셈. 하지만 소비자들의 불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애초에 제기한 진동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동 꺼짐 문제도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르노삼성은 리콜에 해당하는 차들이 연료주입필터에 불순물이 끼기 때문에 시동이 꺼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ECU라는 연료주입제어장치를 업그레이드해 연료주입 세기의 강도를 높이면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필터에 낀 불순물을 연료주입 압력을 높여 제거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와 같은 방법으로 ECU를 업그레이드해본 소비자들 사이에서 또 다른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몇몇 사람들이 업그레이드를 받았는데 그 뒤 연비가 급격히 나빠지고 소음과 진동이 심해졌다는 얘기였다.
리콜 거부운동을 펼치고 있는 동호회 관계자들은 “연료주입압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연비가 낮아지고 진동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자동차정비전문가들도 이번 리콜이 미봉책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신성대학 박병일 교수(자동차과)는 “시동이 꺼지는 건 기계적인 결함 때문인데 전자부품을 업그레이드해서 고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르노삼성 측은 “이번 리콜로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홍보실 서규억 팀장은 “리콜이 1월 24일부터 시작된다. 이전에 소비자들이 받은 서비스와 리콜을 통해 받을 서비스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고 설명했다. “아직 하지도 않은 서비스의 부작용을 얘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는 주장이다.
“르노삼성의 연구팀에 따르면 ECU 업그레이드했다고 해서 연비가 낮아지거나 진동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로서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보다는 이 연구결과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만약 리콜 후에도 문제가 생긴다면 더 완벽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다.”
건교부 리콜 관계자 역시 “소비자들이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고 있는 느낌이다”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정부에서 정확한 조사를 통해 결함을 찾아냈고 르노삼성에서도 그것을 수용해서 리콜을 한 것이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르노삼성과 건교부 관계자의 설명에도 상당수 소비자들의 입장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동호회 관계자는 그 이유가 ‘불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르노삼성 측이 보여준 고객에 대한 불성실한 대응에 너무 심하게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
“가장 분통이 터지는 일은 우리 같은 소비자의 불만을 무시해 왔다는 사실이다. 2000만 원 넘게 주고 차를 사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데, AS센터든 본사든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르노삼성과 끝까지 흑백을 가리겠다는 게 동호회 회원들 모두의 한결 같은 마음이다.”
주행 중 엔진에서 불길이 치솟는 사고를 당한 피해자는 직접 국과수에 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엔진의 근본적인 문제를 밝혀내겠다는 의지다. 동호회 회원들은 집단소송, 집단행동도 준비 중에 있다고 전했다.
한편 르노삼성 관계자는 그동안 소비자들이 받은 서비스의 불만족에 대해 “고객들이 몇몇 영업소에서 불편한 일을 당한 점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고객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연 이번 리콜 분쟁의 결말은 어떻게 나타날까. 향후 르노삼성 측과 소비자들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