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충격받을 때 그들은 기뻐한다
채 씨의 이번 범행에 국민들이 특히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토지보상과 법원의 추징금 등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불을 지른 데다 이미 지난 2006년에도 창경궁 문정전 문짝을 태운 전력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종묘 방화나 열차 전복 등 대중교통수단을 대상으로 한 ‘테러’까지 고려했다는 대목에서 국민들은 놀란 가슴을 한 번 더 쓸어내려야 했다.
범죄전문가들은 채 씨가 사회에 대한 분풀이로 자신의 문제 해결과는 아무 상관없는 숭례문을 태운 점을 두고 현대 사회에 만연하는 ‘묻지마 범죄’의 성격을 띠고 있다며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묻지마 범죄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 개인적인 열등감과 박탈감 등을 불특정 다수나 사물을 상대로 표출하는 것인데 특히 최근에는 방화 범죄가 가장 눈에 띄게 급증하고 있는 유형으로 손꼽히고 있다. 최근 주택가 차량 연쇄 방화범들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방화 사건은 최근 5년간 무려 81.5% 급증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192명이 숨진 지난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도 잊을 수 없다.
범죄심리학자들은 채 씨의 이번 방화가 인명을 앗아가진 않았지만 결코 가벼이 여길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표창원 경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사회적 불만이나 부의 불균등, 양극화에 대한 불만의식에 추가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갈등과 시련, 주변의 무시, 모멸 등이 겹치게 되면 그것을 표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진다”며 “이로 인한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약자의 처지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열린 소통 공간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2의 숭례문 사건’은 물론이고 나아가 ‘묻지마 방화’나 ‘묻지마 테러’ 등 더욱 위험한 참사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방화 범죄가 모방성이 있기 때문에 잠재적인 방화범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인명을 해친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방화 범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도록 중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은 방화범들을 정신분석학적인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수의 전문의들은 채 씨에 대해 “그 스스로 판단할 때 ‘(범죄)동기’가 있었기 때문에 채 씨를 ‘방화광’이나 방화벽을 갖고 있는 인물로 보거나 정신질환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오히려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에 가깝다”고 의견을 밝혔다.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남궁기 교수는 “반사회적 성격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사회 규범을 어기는 행동을 자주하는데 그 뒤에 후회가 없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정신과 전문의들 역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제들을 일차적으로 사회 부조리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나는 무조건 피해자며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는 것만이 급선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결국 위험한 범행을 감행하게 된다는 얘기다.
심리학자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몇몇 심리학자들은 “(반사회적 성향을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피해망상에 젖어 있는 경우가 상당수다. 어떤 문제나 갈등이 발생하면 ‘운이 없어서’ ‘사회가 썩어서’ 심지어 ‘윗사람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식으로 남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왜 나만 이렇게 억울해야 하는가’ 하는 자문도 수없이 할 것이다. 이들은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여러 범죄자 중 특히 방화범들은 범행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채 씨 집에서 발견된 ‘오죽하면 이런 일을 하겠는가’라는 제목의 4장짜리 편지 내용이나 현장검증 과정에서 채 씨가 “문화재는 복원하면 된다”는 말을 한 것만 봐도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시키려는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이에 한 심리학자는 “범행을 계획할 당시부터 이들(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거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미 벗어난 상태에 놓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채 씨는 개인적인 불만을 사회에 알리고자 이번 사건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방화범죄는 일반 범죄와 달리 순식간에 많은 인명을 앗아가기도 하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연쇄방화범들의 경우 범행이 반복될수록 커지는 대담성과 일종의 보상심리 때문에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효과적인 표적물’을 찾게 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문제는 채 씨와 같이 방화욕구를 갖고 있는 잠재적인 방화범들이 우리 사회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다. 최근 급증하는 방화범죄와 관련해 한 경찰 관계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범행 욕구들이 겉으로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를 상대로 범행이 이뤄질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난무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방화를 심각한 범죄로 보지 않는 것도 방화가 늘어나는 또 다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2년 전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놓았다는 유죄판결을 받은 채 씨가 당시 인명피해가 없고 피해가 적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난 바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갖가지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온 피의자들이 씩씩거리며 자주 하는 말이 바로 ‘확 불 질러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너희 가족들 다 태워 죽여버릴 거야’ ‘국회의사당에 불 질러버리고 나도 확 죽어버릴까보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이 사람들은 방화가 무슨 애들 불장난인 양 얘기한다. 꼭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만이 범죄가 아닌데 ‘확 불 질러버린다’는 말을 사람들은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홧김에 자신의 억울함을 표출하기 위한 말, 객기로 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 이런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방화를 저지르는 경우가 상당수다”라고 전했다.
특히 많은 전문가들은 예비 방화범들이 ‘혼자 죽기는 아깝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생각으로 범행에 착수할 때 5년 전 대구지하철 참사의 끔찍한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