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원칙’을 세워라
‘별보기 운동’이 지속되면서 김 씨는 정신이 몽롱해지고 팔다리, 허리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붉게 충혈된 눈은 쉽사리 맑아지지 않고 있다. 끝없는 피로감은 행동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김 씨에게 주말과 휴일도 없이 일하는 샐러리맨에게 흔히 나타나는 ‘얼리버드(Early Bird) 증후군’이 찾아온 것이다.
새 정부 청와대에서 시작된 얼리버드 현상은 이제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정부는 얼리버드 출근자에게 고속도로 통행료를 최대 50%를 인하하겠다며 부채질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지방자치단체들도 변화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경북 포항시는 매월 2회 실시하는 간부 공무원 리더십강좌를 오전 7시에 시작하고 부서별 주요 업무보고도 오전 6시부터 8시 30분까지 실시하도록 했다.
경주시도 간부회의를 종전 오전 9시에서 8시 30분으로 앞당겼다. 김천시는 매주 세 차례 시장 및 국장이 주재하던 간부회의 시간을 오전 8시로 1시간 앞당겼으며 회의를 1시간 안에 마쳐 오전 9시부터는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대구지방경찰청과 산하 경찰서는 종전 오전 8시 50분에 시작하던 참모회의, 일일업무회의를 오전 8시로 당겨 열기로 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오전 7시 조찬모임 강연 등 기업들의 각종 오전 행사가 늘어나면서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조식 매출이 50% 증가했고 소공동에 위치한 롯데호텔은 9%,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 역시 14% 정도 매출이 증가했다고 한다. 투숙객 위주였던 식당이 비즈니스를 위한 장소로 각광받으면서 호텔 측에서는 식당을 좀 더 넓은 장소로 변경하거나 아침 메뉴를 보강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하는 모습이다.
직장인들의 아침도 바빠졌다. 인터넷 취업 포털 인크루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1896명 중 540여 명(28.5%)이 ‘올해 들어 출근시간이 빨라졌다’고 응답했다. 오전 7~8시에 출근하는 사람(47.8%)이 가장 많았고 오전 6~7시에 출근한다(21.1%)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른 출근 시간에 대한 직장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출근시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얼리버드족’은 지난해보다 평균 43분 정도 일찍 출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퇴근시간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아 ‘근무시간이 오히려 늘었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또 ‘잠이 부족해 피로감이 풀리지 않는다’거나 ‘오후만 되면 업무 집중도가 떨어진다’고 호소한 이들도 있었다. 얼리버드족의 57.2%가 ‘출근시간이 앞당겨진 만큼 업무성과나 효율성이 실제로 높아지거나 앞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해 빠른 출근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 얼리버드 증후군을 호소하는 샐러리맨들이 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해 일본 교토의과대학에서는 새벽 5시 이전에 일어나는 사람은 2~3시간 후에 일어나는 사람에 비해 고혈압 및 동맥경화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결과를 공개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팀은 하루 5시간 이하 수면을 취하는 사람들은 7시간 수면을 취한 이들에 비해 당뇨병 발병 위험이 더 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9시간 넘게 너무 많이 자는 사람 또한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성인의 적정 수면시간은 7∼8시간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람에 따라 4~5시간의 수면으로도 충분한 사람이 있고 9시간 이상 취침해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사람도 있다. 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패턴에 익숙한 ‘저녁형 인간’이 적합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전문가들은 심각한 저녁형 인간이 아침형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면서 개인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누구나 아침형 인간이 되길 독려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얼리버드 증후군이 지속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정서가 불안해져 공격성이 나타날 수 있으며 짜증 우울증 불면증 등 정신적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기화할 경우 비만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등을 일으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고 한다.
조기 출근과 관련해 다양한 문제점이 지적되는 가운데 얼마 전 ‘휴일에는 출근하지 말라’는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의 이메일이 관가에 화제로 떠올랐다. 원 장관은 공무원들의 노고에 대한 위로와 함께 앞으로 모든 공휴일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휴식을 취하라는 내용의 짤막한 글을 전했다.
새 정부 출범 후 ‘휴식’ 또는 ‘휴일’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공무원들이 환영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무원들은 이를 얼리버드 현상을 깨는 신호탄으로 해석하며 다른 부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명박 대통령의 성격상 얼리버드 바람이 쉽게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얼리버드 증후군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건강 전문가들은 얼리버드 증후군은 단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며 몇 가지 규칙을 정해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수면시간을 정해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날 것 △취침 전 15~20분 정도 반신욕이나 족욕을 해 숙면할 수 있도록 할 것 △오후 5시 이후에는 카페인 음료를 마시지 말 것 △장시간 낮잠을 자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회사의 방침이 바뀌지 않는 한 나 홀로 출근시간을 늦출 수는 없는 일이다. 피할 수 없다면 얼리버드 증후군을 최소화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보자. 괴롭던 직장생활, 그나마 좀 나아지지 않을까.
김미영 객원기자 may424@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