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 상처’ 대충 꿰매다 덧날라
삼성반도체 백혈병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관계자는 “애초에 삼성 측은 백혈병에 걸린 직원이 2명이라고 했다가 제보가 하나둘 사실로 확인되자 결국 8명이라고 인정했다”고 전했다. 삼성 측이 상황에 따라서 입장을 바꾸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또 대책위는 “삼성 측이 피해자 가족에게 대책위에서 빠지라는 회유와 협박을 하고 있으며, 기자를 사칭해 대책위 관계자들의 신상을 파악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삼성 측이 다양한 방식으로 백혈병 발병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대책위의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피해자 가족들의 증언과 삼성 측의 해명을 통해서 그 진실을 알아본다.
삼성반도체와 대책위가 처음으로 부딪친 사건은 ‘삼성직원의 기자 사칭 사건’이다. 지난해 11월 대책위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정문에서 ‘삼성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사망사건 진상규명 촉구 집회’를 열었다. 당시 여러 명의 기자들이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는데, 대책위 관계자들은 그 중에서 좀처럼 기자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에 주목했다. 다른 기자들에게 ‘정체불명의 사진기자’에 대해 물어보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책위 관계자 한 사람이 그에게 소속을 물었다. 그랬더니 “N사 기자”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진짜 N사 기자’가 취재를 하고 있었다.
결국 ‘N사 기자’라고 밝힌 사람은 삼성반도체 직원으로 밝혀졌다. 대책위 이종란 노무사는 “카메라를 뺏어 확인해보니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얼굴이 클로즈업된 사진을 여럿 발견했다”고 밝혔다. 대책위 관계자들은 경찰을 불러 기자를 사칭한 삼성직원과 함께 파출소로 갔다. 여기서 삼성직원은 “본의 아니게 기자임을 사칭해 죄송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책위는 이 사건을 법정으로까지 끌고 갔다. 수원지방법원에 집회에 참석했던 9명의 이름으로 일인당 300만 원, 총 27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낸 것. 이들은 “피고 회사(삼성반도체)가 소속 직원으로 하여금 기자를 사칭해 은밀하게 원고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원고들을 한 사람씩 클로즈업하여 촬영하는 등 원고들의 인격권, 초상권 등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원고들은 부정한 방식의 감시대상이 됨으로써 심한 모욕감, 불쾌감, 공포감 등으로 고통 받는 피해를 입었다”고 청구 취지를 밝혔다.
이에 대해 삼성반도체 홍보실 이승백 부장은 “기자를 사칭한 일은 잘못”이라면서도 “당시 상황은 몇 가지 오해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직원은 홍보실의 사보 담당 직원이며 내가 사진을 찍으라고 지시했다”며 “회사 역사상 처음 있는 집회라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 사진을 찍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자를 사칭한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라 다소 험악한 분위기에서 얼떨결에 나온 말”이라고 전했다. 집회 참석자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실에 대해서도 “평소 사진 찍는 스타일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삼성 측의 백혈병 사건 관련 대응책에 대해서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피해자 가족들이다. 이들은 모두 그동안 “삼성 측이 ‘대책위에서 빠지면 보상을 해주겠다’고 회유하거나 ‘산재신청을 하면 그동안 회사에서 지원받은 의료비, 퇴직금 등을 모두 돌려주어야 한다’고 협박했다”라고 입을 모은다.
삼성 측은 이에 대해 “회유나 협박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 “백혈병으로 사망한 직원들의 가족들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경제적인 면을 포함한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주어 왔다”며 “사망한 직원에게 위로금과 장례비 등을 지급한 내역까지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삼성반도체에 다니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황유미 씨(사망 당시 21세)의 아버지 황상기 씨(54)는 “딸이 백혈병에 걸리고 나서 치료비를 포함한 여러 가지 경비로 8000만 원이 들었다. 회사에서 우리에게 준 돈은 지금까지 4300만 원이 전부다. 나머지는 퇴직금과 보험료 그리고 빚을 내서 치료비를 충당했다. 딸이 죽은 후에 장례비는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2005년 7월 백혈병으로 남편 황민웅 씨(사망 당시 32세)를 잃은 정애정 씨(32)는 “회사 측에서 따로 보상금을 준 적이 없다”고 전했다. 그는 “직장인이 사망시 받을 수 있는 퇴직금, 보험금, 개인연금 외에 회사로부터 위로금 같은 것을 받은 일이 없다”고 밝혔다.
정 씨는 10여 년 동안 삼성반도체 생산직 노동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남편 사망 후 1남 1녀의 자녀를 돌보기 위해 작년 3월에 퇴직했고 현재는 어린이 놀이방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황상기 씨는 “대책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말거나 탈퇴하라는 삼성 직원의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도 삼성직원이 찾아와 대책위 활동을 그만두면 적절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말하고 갔다”며 “그 말을 전한 삼성반도체 직원의 명함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삼성 측의 태도에 대해 대책위 이종란 노무사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얼마나 줄 테냐’는 식으로 돈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권유한다. 왜냐하면 돈을 요구하면 삼성 측이 이를 빌미로 대책위 활동을 보상금 몇 푼 더 받아내려는 속셈으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황 씨는 삼성 측의 얘기대로 적절한 보상을 받고 대책위 활동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그는 “내가 대책위에서 삼성과 싸우지 않으면 내 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또 생긴다.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대책위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정애정 씨 역시 대책위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다. 그는 “나도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면서 건강이 계속 나빴고 2002년에는 유산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곳의 여성들은 생리불순이나 유산 등을 근무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지 못하거나 그렇게 생각해도 회사 내의 분위기 때문에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한다”라며 “대책위 활동이 세상에 소개되면 그곳에서 현재 일하고 있는 노동자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